2. 작심삼일 그리고 다시 새롭게
작심삼일은 진리다. 작심삼일은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행동의 법칙이다. 슬기로운 육아생활은 삼일을 가지 못해 삐끗했다. 처음 이틀은 육아와 성장의 선순환, 지속 가능한 육아라는 목표에 제법 어울리는 슬기로운 육아생활을 실천했다.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학교에 가지 못하는 쌍둥이들을 위해 운동에서부터 천자문 공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진행했다.
신체활동으로 집 안에서 두 아이를 한 팀으로 묶어 둘이서 나와 레슬링을 하게 했고, 밖으로 나가 근처 산책길을 땀이 나게 뛰었다. 공부로는 기적의 한글 학습법으로 한글을 가르쳤고, 블록을 이용해 천자문을 만들며 놀이와 학습을 연계시키기도 했다. 브루마블 게임을 하며 곱하기의 개념을 가르쳤고, 만화는 한 번에 30분을 넘지 않게 하루 4번, 총 2시간으로 제한했다. 잠은 9시 30분 이전에 재웠으며, 잠들기 전 동화책을 읽어 주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소고기 미역국과 콩나물국을 끓였고, 양파 당근 브로콜리 볶음밥으로 아이들의 영양을 생각한 식사를 만들었다. 나 역시 새로운 다짐으로 아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했고 화내지 않았으며, 공부하는 아내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건강을 위해 비타민씨 등의 영양제를 복용했고, 아이들과 뛸 때 나 역시 운동이 되도록 열심히 뛰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 오랜만에 독서를 했고, 일기를 쓰기도 했다. 그런데 딱 이틀만 그랬다.
삼일 째가 되니 피곤과 짜증이 2인 3각 경기하듯 발을 묶고 찾아왔다. 머리가 멍해졌다. 두 번 운동하고 영양제 먹는다고 갑작스럽게 좋아질 체력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비도 왔다. 비가 오니 나가지도 못해 아이들은 끓어오르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했다. 레슬링을 하자고 했는데, 힘이 없어 그대로 누웠더니 나의 배에 올라타며 계속 놀자고 졸라댔다. 하루 종일 내가 감당하기에 벅찬 에너지를 쏟으며 자꾸만 들러붙었다. 하도 들러붙어서 쌍둥이들을 재우고 ‘들러붙다’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기도 했다. 온라인 사전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 끈기 있게 철썩 붙다. 2) 한 곳에 머물러 자리를 뜨지 않다. 3) 어떤 일에 몹시 열중하다.
돌이켜 보니 쌍둥이들은 ‘들러붙다’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이 들 때까지 끈기 있게 나에게 철썩 붙어 있었고, 내가 가는 곳마다 졸졸 따라와 자리를 뜨지 않았으며, 나에게 이것저것 말하고 물어보고 요구하며 때 쓰는 일에 몹시 열중했다. 사전에 적힌 의미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대단한 실행력이다. 문득 쌍둥이들이 지금의 실행력을 기억하고 간직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다음에 커서 너희가 좋아하고 바라는 그것에 ‘들러붙어’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아빠의 마음으로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작심삼일이 되던 날은 너무 끈질기게 ‘들러붙는’ 아이들로 피곤하고 힘들었다.
종종 쌍둥이들은 같이 놀 수 있으니까 좋겠다는 얘기를 듣곤 했다. 하지만 우리 집 쌍둥이들은 아니었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둘 다 서로 경쟁하듯 아빠에게 엄마에게 요구한다. 엄마에게는 좀 덜한 편인데, 특히 아빠가 편안하게 있는 꼴을 못 본다. 잠깐 인터넷이라도 할 요량이면 어느새 한 녀석이 내 무릎 위로 올라가 더듬더듬 한글을 읽으며, ‘아빠 뭐해, 이게 뭐야’라고 물어본다. 그러면 그 소리를 듣고 다른 아이가 번개처럼 나타나 무릎 자리를 잡은 녀석을 밀치고 올라온다. 그리고 이내 둘은 나의 무릎을 두고 싸우기 시작한다. 노는 시간은 잠깐이고 둘의 주장을 정리하고 둘의 시비를 가리며 싸움을 중재하는 시간은 계속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나는 항상 아이들과의 초밀착 관계가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잠을 자거나 만화를 보고 있을 때 말고는 나의 시간이 없었다. 오후만 넘어가면 피곤과 짜증이 몰려왔다. 속에서 나도 모르게 화가 끓고 있어 건드리기만 하면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되니,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참지 못하곤 했다. 그랬던 사람이 나였는데, 코로나 바이러스로 야기된 24시간 가족 밀착 생활로 그 피로가 누적되어 있는 데다 이에 더해 슬기로운 육아생활을 한답시고 가뜩이나 진을 더 빼고 있었다. 초기 이틀은 작심 효과와 의지로 버텼지만 결국 체력과 인내력의 한계가 3일째 드러나게 되었고, 다시금 예전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와르르 무너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 내가 있어야 할 자리, 슬기로운 육아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힘인 회복탄력성이 나에게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바로 글쓰기에서 나왔다. 글쓰기가 위대한 이유는 글은 가장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들여다볼 수단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글을 쓰는 지금 순간에도 문장의 주체와 행위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나를 정말 사랑하는지, 사랑한다면 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글의 힘인 것이다. 글을 쓰는 순간, 나는 생각하게 되고 내가 쓰는 사람과 사건에 대해 집중하게 된다.
나는 아빠의 편지를 1주일에 한번 쓰고 있다. 쌍둥이들이 태어나고 아이들의 어릴 적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아이들의 성장 모습을 일기처럼 기록하여 일주일에 한 번 편지를 쓰고 있는데, 이번 편지에서는 슬기로운 육아생활이라는 관점으로 아이들 일상과 나의 육아를 들여다봤다. 결론은 나의 저질 체력과 통제적 습성이 가장 문제였다. 체력을 키우고 통제를 줄이면 괜찮은 육아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우선 나의 체력 증진에 집중하기로 했다. 잠을 충분히 자는 것이 책 한 줄 더 읽는 것보다 중요하다. 좋은 체력이 받침이 되어야 짜증과 화를 덜 내기 때문이다.
마치 체력이 부족한 축구팀이 아무리 훌륭한 전술과 기술을 가지고 있더라고 승리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히딩크 감독님 말처럼 먼저 체력을 길러야 한다.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버틸 수 있는 체력이 우선이다. 다음으로 통제적인 부분, 사실 이것은 쉽지 않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나의 성격과 가치가 개입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쨌든 아이들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키우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맞다.
이렇게 나는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마음으로 풀타임 육아생활에 들어갔다. 다양한 신체활동과 학습을 병행하며 조금 더 유연해진 방식으로 다시 슬기로운 육아생활 프로젝트를 가동 중에 있다. 꽉 짜인 프로그램이 슬기로운 육아생활을 만들어 주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슬기로운 육아생활은 나와 아이들이 행복한 생활이어야 한다. 집은 엄마와 아빠와 아이들이 함께 하는 즐거운 공간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과 같이 하는 모든 활동에서 나의 기준이 아니라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아이들이 원하는 방식을 우선으로 삼기로 했다.
무너지더라도 다음 날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아이들에게 맛있는 밥을 먹이고, 즐겁게 놀아주며, 한글을 가르치고 많이 웃는 멋진 아빠가 되자. 육아와 성장의 선순환이 일어나고, 지속 가능한 행복한 육아, 슬기롭고 멋진 육아는 앞으로도 숱한 난관과 실수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겠지만, 그럴 때마다 포기하지 말자. 다시 시작하자. 나는 우리 아이들이 엄청 자랑하는 아빠, 완전 좋은 아빠가 되는 꿈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 아빠 때문에 너무 좋았다. 아빠처럼 되고 싶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내 인생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작심삼일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