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봄의 외상값

by 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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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왔던 감나무도 제법 자리를 잡았다. 겨우내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 메마른 가지에서 아기 손톱 같은 새순이 돋아났다. 들판엔 겨우내 뿌리를 내린 보리가 따뜻한 바람과 함께 연둣빛 고개를 내밀었다. 길목마다 논을 갈러 가는 소가 눈 똥이 민들레를 노랗게 키우고 있었다. 그렇게 매섭던 지난날의 기억은 봄으로 지워졌다.


정순이는 열일곱이 되었다. 열다섯이 된 창석이의 부러졌던 다리도 어느덧 다 아물었다. 중학생이 된 만석이는 형과 함께 읍내의 학교에 다녔다. 막내 동석이는 일곱 살에 학교에 입학했다. 정순이는 아침마다 동석이의 호주머니에 손수건을 챙겨 넣었다. 책가방을 메고 있으니, 몸집이 유난히 더 작아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 작은 것이 어째 학교를 다닐란가…’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석이는 저도 이제 형아가 되었다는 게 그저 좋았다. 배웅하는 누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학교가는 아이들 사이로 쪼르르 뛰어 들어갔다. 동생들을 모두 보내고 나면 먼지도 가라 앉았다. 혼자 남은 정순이는 그 먼지들을 보며 가슴속에 울컥거리고 울렁거리는 뭔가를 느꼈다. 그럴 때, 더욱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설거지를 하고 온방을 쓸고 닦고서는 도시락을 싸 시장에 나갔다.


좌판에는 엄마가 없었다. 정순이는 나물 장수 아줌마에게 인사했다.


“엄니는 어디 가셨다요?”


“느그 엄니, 우리상회에 갔을 것인디? 아침부터 뭔 물건을 안 준다고 해쌌더만…”


우리상회는 생선 좌판 상인들에게 생선과 오징어를 떼어주는 장흥바닥에서 제일 큰 도매상이었다. 장사를 접으라는 말일까, 쿵쾅 올라오는 불안함을 달래며 우리상회로 달려갔다. 멀리서, 찢어지는 듯한 큰 소리가 나고 있었다.


“외상은 안된다께! 매번 외상으로 달아 놓으믄 우리보고 어쩌라는거여? 내가 자선사업가냐고잉?”


그 소리에 정순이도 움츠러들었다. 그 사이로 조곤거리며 살살기는 엄마의 목소리도 함께 흘러나왔다.


“이번 한 번만 봐주믄 안될까라? 겨울에 우리 집 아자씨가 그렇게 가시고… 지가 정신이 없었어라… 근디, 인제 아그들도 커간께 돈 들어갈 데는 많고… 어짜까요이”


“그란께 우리도 그짝 사정을 여태껏 봐준 것 아니여! 근디, 이놈의 외상은 날이믄 날마다 늘어간디! 하아따, 참말로 너무 하구마잉. 우리가 무슨 지간이라고 여따대고 사정을 하냔 말이여― ”


“이번 딱, 한 번만. 지가 진짜 그 은혜는 죽어도 못잊지라.”


“아니, 부자로 사는 큰 딸 두고 뭣하는 것이여! 연순이 부잣집에 시집간다고 떠들썩하더만! 빛좋은 개살구구만? 그집 멀쩡한 사우 납두고.”


“…….”


더 이상 대꾸를 못 하고 가만히 서 있는 엄마는 죄인 같았다. 한참을 쏟아부은 사장은 난처하다는 듯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 소리를 다 듣고, 울컥 쏟아지는 눈물을 삼킨 정순이가 엄마옆으로 얼른 달려왔다.


“사장님, 안녕하셔요.”


“으흠, 으흠… 응. 그려. 엄니 도와주러 왔냐? 이번이 마지막이여. 열흘 안으로 절반은 갚으쇼. 안 그라믄 우리도 어쩔 수 없이 거래 영 끊어야 된께.”


뒤짐을 진 아저씨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그 뒤통수에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쫓기는 사람처럼 생선 상자 여러개를 구르마로 옮겼다.


“정순아, 얼른 가자이.”


좌판에 도착한 엄마는 전에 일은 영 없던 것처럼 상자에서 생선을 꺼내 자리를 정리했다.


“오늘은 장사가 늦었어야. 싸게싸게 움직여야제 안되겄다.”


자리 정리부터 생선 내장 손질까지 그 손은 쉴 틈이 없었다. 바삐 움직이는 사이에도 행인들을 잡기 위해 내빼는 목청은 하루 벌이의 절박함으로 쩌렁댔다.


“엄니, 인제 내가 할란께 저 짝에서 좀 쉬쇼. 밥 좀 자시고.”


“지금, 한시가 바쁘단 마다. 밥 먹을 새가 어딨다냐?”


“엄니, 지발 좀 쉬시란께요!”


정순이는 그 손에 있던 것을 억지로 뺏어 들었다. 딸에게 밀리고서야 조금 정신이 난 엄마는 한쪽으로 가 앉았고 정순이는 더 부지런히 생선을 손질했다. 손가에 닿는 차가운 물의 감촉에 마음까지 차가웠다.


“엄니, 지가 언니한테 한번 가볼까라? 말이나 좀 해보믄…”


“오메메, 큰 일날 소리 한다! 우리까지 가서 손 내밀믄 연순이가 그 집에서 더는 설 자리가 없어야.”


“그라믄 지가… 식모살이라도 할까라?”


그 말에 엄마는 저도 모르게 정순이의 등짝으로 손이 나갔다.


“시방 이것이, 엄니 쓰러지는 꼴 보고 자프냐? 느그 언니 식모살이 시킨 것도 내 평생 한이 되았어야!”


“그라믄 어쩐다요? 외상값을 열흘내에 우찌케 다 갚는다요…”


“엄니가 다 알아서 할 건 게, 너는 걱정하지 말어. 다 잘 될것이여. 너는 암 걱정도 하지마러야…”


엄마는 애써 웃어 보이며 정순이의 등을 쓸어주었다. 그러고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목청껏 소리 내서 신명 난 사람처럼 생선을 팔기 시작했다. 옆에서 생선을 손질하는 정순이 마음만 점점 더 가라앉았다.


“엄니, 나 인제 동석이 올 시간이 되아서 집에 가볼께라.”


“그려. 집에 가는 길에 언니한테 들려서 개기 좀 갖다줘라. 요즘 통 못 묵는가, 얼굴이 말이 아니더라.”


엄마는 검은 봉지에 조기 두어 마리와 오징어 몇 마리를 넣은 꾸러미를 들려 보냈다. 달랑달랑 꾸러미를 들고 생각에 빠져 걷다 보니, 어느새 연순의 집 앞이었다.

연순이는 시어머니의 반대로 아버지 장례에도 참석을 못 했고 장지에서 사람들이 비석까지 다 세운 후에야 몰래 다녀갈 수 있었다. 한 고장에서 지척에 있는 친정이건만 마음 놓고 오갈 수 없어 늘 도둑고양이처럼 다녀가곤 했었다. 언니 시댁의 견고한 대문이 정순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언니야- 나 왔네.”


부엌에 있던 연순은 동생의 기척에 기쁜 기색으로 나왔다. 얼굴이 아버지의 49재 때보다 더 수척해져 있었다.


“집에는 아무도 안 계시는가? 형부는 잘 있제?”


정순이는 꾸러미를 연순에게 건네주고 마루에 앉았다.


“다들 일하러 나가시고… 엄니는 절에 가신다고 하셨는디… 정순아, 밥 안 먹었제? 점심 먹고 가라.”


“아니여. 동석이 챙겨야제. 인자 학교 다녀왔겄네.”


“아, 동석이는 학교 잘 다니고 있다냐? 창석이랑 만석이도 잘 있지야?”


“동석이는 형부가 사준 책가방이 제 몸만 해브러. 근디도 그 가방이 그라고 좋은가 달랑달랑 학교에 간디, 뒤

도 안 돌아보고 뛰어 들어 간단께? 창석이랑 만석이도 둘이서 같이 학교 가제. 두 놈 같이 간께 딴 길로 샐까 걱정도 덜 되고 그래. 언니는 요즘 어때?”


정순이는 연순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나야, 뭐. 잘 있어, 나는… 내 걱정은 하지 말어…”


애써 웃는 연순의 얼굴에 왠지 그늘이 드리운 것 같았다.


“언니… 그란디, 혹시 돈 좀 있는가?”


정순이는 엄마가 하지 말라는 그 말을 꺼내고 말았다.


“왜? 무슨 일 있어? 얼마나 필요한디? 말해봐.”


연순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 얼굴을 보자 갑자기 언니의 시어머니가 떠올라 버렸다.


“아, 아니여… 아침에 만석이가 참고서 좀 사달라 했던 게 생각나서… 집에 가는 길에 사 갈까 했는디 깜빡하고 엄니한테 돈을 안 받아 브렀어.”


“아이고― 나는 또. 그 정도면 언니가 얼마든지 줄 수 있제.”


연순은 방으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손지갑을 들고나와 그 안에 있던 빳빳한 지폐를 다 꺼내 정순이에게 쥐여 주었다. 만 원짜리 몇 장, 천 원짜리 몇 장.


“언니, 뭐 이걸 다 준단가? 참고서 한 권에 천 원이믄 되는디.”


“야, 참고서 한 권이믄 된다냐? 지난번에 선생님이 써준 종이 본께 공부 할라면 책이 한두 권 필요한 것이 아니더라. 글고, 뒤돌아서면 배고프다 할 녀석들인디 맛난 것도 좀 사 주고 그려.”


“나한테 이걸 다 줘블믄 언니는 어떻게 살라고 그래?”


정순이의 걱정에 연순이가 웃으며 말했다.


“뭔, 니는 내 걱정을 다 혀? 또 필요 하믄 말해. 알았지야?”


그러고는 불현듯 무엇이 생각났는지 방에서 꾸러미를 잔뜩 싸 들고 나와 정순이 손에 건넸다.


“화장품이여. 이제 너도 꾸미고 다닐 때가 됐지. 로션이랑 분이랑 루주랑 넣었은께 일만 하지 말고 잘 연구해 봐.”


얼떨떨해하며 그것을 받는 정순이 얼굴 위로 당혹감이 올라왔다.


“이것을 나한테 줘도 된단가?”


“안될 것이 뭐가 있다냐? 화장대에 넘치는 게 화장품이여. 아, 근디 이것 들고 갈라믄 시어머니 오시기 전에 얼른 일어나야쓰겄다.”


그 말까지 하고는 누가 훔쳐볼세라 주위를 살피더니 꾸러미를 허름한 보자기에 다시 싸맸다.


“요 안에 접때 읍내에 나갔다가 니 줄라고 사놓은 원피스도 있은께 한번 입어봐. 니랑 잘 어울릴거여.”


그러고는 정순이를 일으켜 대문으로 이끌었다. 정순이는 그 집을 나서며 그런 연순에게 마지막까지 우리상회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싶었다. 연순이 쥐여 준 돈으로는 빚의 반의반도 갚기 어려웠지만 얼마간 엄마에게 손 벌리지 않고 살림을 일구어 가는 데 유용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연순이 어렵게 모아둔 돈의 모든 것임을 알기에 마음이 더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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