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이는 집으로 와 배고프다는 동석이에게 얼른 밥을 차려주었다. 밥을 먹은 동석이는 동네로 놀러 나가고 정순이는 호미를 들고 텃밭을 일구었다.
그동안 아버지의 병수발을 드느라 손을 놓아버린 텃밭은 엉망이었다. 무성하게 자라난 텃밭을 부지런히 호미질해 잡풀을 뽑았다. 마당에 심을 파와 고추, 당근과 고구마를 생각하니 풀을 매느라 등에 땀이 나는지도 몰랐다.
“정순아―”
미자였다. 그녀는 학교를 그만두고 읍내 미용실에 취직해 미용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손재주가 좋고 꼼꼼한 데다가 꾸미는 것을 좋아했던 그녀는 언젠가 자신만의 미용실을 차리는 것이 꿈이었다. 정순이는 흙을 털고 마당에서 일어났다.
“미용실 다녀오는 길이여? 가위질 좀 배웠어?”
“배우긴, 뭘 배웠겄냐? 머리카락만 죄다 쓸고 왔다이.”
그녀는 오는 길에 사 왔다는 술빵을 꺼내 놓으며 마루에 앉았다. 비닐에 싸진 그것은 아직도 따끈따끈했다. 정순이는 친구를 보며 뽀얀게 퐁신한 술빵과 닮아 잠 예쁘다고 생각했다.
“미자야, 언니 집에 갔다왔는디, 화장품 이것저것 받아왔거든? 같이 발라 볼래?”
“오메, 진짜로? 뭐, 뭐 있는디?”
미자는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로션이랑 분이랑 루즈랑… 죄다 모르는건디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미용실 다닌 니가 나보다 낫지 않겄냐?”
“화장은 나도 처음이지만… 장흥의 정윤희쯤은 만들 수 있지 않겄냐?”
수돗가에서 세수하고 꾸러미를 펼친 둘의 모습은 자뭇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두 소녀의 눈은 호기심과 설렘으로 일렁였다. 상자에서 화장품을 하나씩 꺼내 냄새를 맡고 발랐다. 향긋한 냄새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것을 찍어 바르면 영화관 간판 속 여배우처럼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거 향기가 너무 좋다! 세수하고 나서 맨 처음에 이걸 바르는 거 아녀? 스킨?”
미자가 병 뒤에 쓰인 작은 글자를 보고 말했다.
“그 다음은 이거, 로션. 에구, 냄새는 좋은디 미끄덩한게 영 이상해.”
“정순아, 이 하얀 거는 뭐냐? 얼굴에 다 발라야 하는거여?”
“몰라. 언니가 이거 바르면 얼굴이 하얘 진다더라.”
두 소녀는 조심스럽게 파우더를 톡톡 두드리다가 결국 서로의 얼굴에 뭉친 분을 보고 킥킥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야아- 이거, 아무래도 안 되겄어. 이래서는 정윤희는커녕 탐진강 처녀귀신이 친구하자 하겄다!”
거울을 들여다본 정순이가 심각해져서 말했다.
“야야! 다시 세수하자!”
둘은 다시 꼼꼼하게 세수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이번엔 아까보다 연하게 펴 발랐다.
“여기에다가 루즈를 살짝만.”
미자는 정순이 입술에 루즈를 살짝 펴 바르고 제 입술에도 톡톡 펴 발랐다. 둘은 서로 거울을 보며 입술을 옴하고 모아 붉은빛 루즈가 봉숭아빛깔만 돌도록 가볍게 맞물려 퍼뜨렸다.
“야! 이거네, 이거! 예쁘다―”
미자는 거울로 정순이와 제 모습을 살펴보고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미자의 이목구비는 워낙 시원시원해서 살짝 색칠 했을 뿐인데도 금세 화사해져 생기가 돌았다.
“미자 너는, 화장 하니까 진짜 이쁘다야! 완전 배우같애!”
“야, 너도! 정윤희는 아니어도, 장미희는 울고 가게 생겼어야.”
거울을 들여다보니 거뭇했던 피부가 조금 화사해진게 전보단 확실히 나아 보였다.
한참 거울을 들여다보며 웃고 떠들다가 우리상회 일이 갑자기 떠올랐다. 거울을 내려놓고 미자를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 나도 어디 가서 돈 벌 데가 없을까?”
“우리가 어디 가서 돈 벌겠냐. 돈 벌라믄 광주나 목포 가서 식모살이하든가, 공장 들어가든가 해야제. 왜?”
“엄마가 외상이 밀렸는디, 그것을 열흘안에 갚으라고 안하냐… 우리 엄니 알잖여. 식모살이는 절대로 안 된다 그러고… 뭔 좋은 수가 없을까 싶어서…”
“어쩐다냐. 느그 동생들 죄다 학교를 다녀서 돈 들어갈 데도 많을 건디… 나도 일할만한 곳이 있을지 알아볼게.”
미자가 돌아가고 난 후, 더욱 적막해진 집에 따스함이 필요했다. 된장국을 끓이고 고등어를 지져 저녁을 차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다시 장사를 시작한 엄마의 귀가는 전보다 더 늦어졌다. 정순이는 동생들 밥을 챙겨주고 제 밥도 된장국에 말아 후루룩 들이킨 다음, 야학에 갈 준비를 했다.
“창석아, 누나 다녀 올란께 뒷정리 해놔라. 엄니 오면 밥 좀 차려드리고. 알았지야?”
정순이는 신발을 신으면서 아직 밥을 먹고 있는 창석이에게 말했다.
“응. 걱정하지 말고 조심히 다녀오소.”
동석이는 밥 먹다 말고 일어나 누나를 따라 나왔다.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말했다.
“근디 누나, 오늘 왜 이라고 이뻐?”
그 말에 지우지 못한 화장을 그제야 생각해 내고는 조금 부끄러워져 고개를 돌렸다.
“뭐‥ 뭣이, 누나 원래 이쁘잖애. 다녀온다이!”
서둘러 인사하고 나간 작은누나. 그 뒤에 한참 서서 바라보고 있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예뻐 보이는 게, 누가 잡아가면 어쩌지 잠깐 걱정이 되었다. 형아가 밥 먹으라는 소리에 곧 그것도 잊고 방으로 들어갔다.
정순이는 봄이 되자, 다시 야학에 나가기 시작했다. 동생들이 모두 학교를 나가게 되자,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씩 움터왔다. 새벽같이 시작한 하루는 길었지만, 야학을 가는 발걸음은 오히려 힘찼고 가벼웠다.
야학 가는 길, 벌써 해는 졌고 강바람이 차가웠다. 그때, 골목 어귀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정순이?”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그 목소리는 매번 고등어만 사갔던 남학생, 엄마 친구 귀녀 이모의 아들, 영호였다. 아버지 장례식 때 엄마들과 함께 인사를 나눈 이후, 정순이는 를 더욱 살갑게 대했다. 여전히 변변한 말도 제대로 못 꺼내는 그였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꽁으로 생긴 오빠였다. 매번 생선을 사러 오는 그를 웃는 낯으로 대하며 덤으로 오징어를 얹어주기도 했다.
“어어? 영호 오빠네! 인제 집에 가?”
혼자서 야학에 가는 길이 좀 스산하던 차에 아는 이를 만나니 기뻤다.
“으응. 너는… 야학 가는 길이야?”.
“응. 나, 공부 다시 시작해보려고.”
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다른 말 없이 옆에서 계속 걸었다. 한참 웃고 떠들던 정순이는 그제야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오빠는 어디 가는데 계속 나랑 같이 가?”
“아, 아니‥ 그, 그게…”
갑자스런 물음에 당황한 그는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빤히 쳐다보며 묻는 정순이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앞만보며 걸으며 말을 더듬었다.
“ 집이 이 근처야? 잘됐네- 나랑 저쪽 교회까지만 같이 가면 되겠다.”
정순이는 말을 더듬는 그가 한 두 번은 아닌지라 아무렇지않게 대꾸 하고는 걸어 나갔다. 영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슬몃 훔쳐본 그녀가 오늘은 더 예뻐 보인다고 생각했다.
“나, 이제 갈게! 다음에 생선 살 때도 꼭 우리 집에서 사. 알았지? 안 그럼 배신이다!”
정순이는 대답은 어차피 들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지 말만 툭 뱉고는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영호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가, 문득 향기가 참 좋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위험한데’
라는 생각까지 하고 나자, 불안해졌다. 결국엔 야학이 끝나는 시각까지 서성이고 말았다.
저 멀리서 사람들 사이로 정순이가 보였다. 주춤거리던 영호는 한 청년이 정순이를 불러 세우는 것을 보고서야 불쑥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청년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그녀는 눈앞의 그를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오빠, 집에 안 갔어?”
“아… 공부하다가… 바람이나 쇠러…”
말 끝을 흐리며 정순이의 눈길을 피해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그럼… 바람 잘 쇠고, 조심히 들어가!”
정순이는 저 오빠가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네, 생각하고는 깊은 밤이라 더 싸늘해진 날씨에 으드드드 어금니를 떨며 총총 걸어갔다. 그는 그 뒤를 따라 뛰어가 그녀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아‥ 아니, 밤길 위험해. 어차피 나는 바람 쐬러 나온거니.. 집까지 바래다줄게.”
집에 가는 길, 지나갈 때마다 큰 개가 컹컹 대는 으스스한 골목길이 생각나 바래다준다는 영호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고마웠다.
“아- 따, 지금까지 덤을 얹어준 보람이 있고만! 안 그래도 저 쪽 골목이 늘 무서웠거든. 예전에는 미자가 같이 야학에 다녔는디, 지금은 혼자 다니고 해서.”
정순이는 그를 보고 씩- 웃었다. 그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앞만 보고 걸어가면서 그는 그녀의 맑은 미소가 좋았다. 야학에서 배웠던 것을 이야기하고, 어려웠던 것을 물어보고, 영호는 또 친절히 대답해 주다 보니 어느덧 집 앞이었다.
“벌써 다 왔네. 오빠, 고마워! 대학교 갈라믄 열심히 공부해야제. 나 들어갈게. 오빠도 조심히 가소.”
정순는 씩씩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내일도‥ 야학 가?”
“아니, 야학이 매주 화, 목요일에만 열려. 나도 요즘처럼 공부가 잘될 때믄 매일 열었으면 좋겠네.”
“그래. 나 간다.”
정순이는 말도 못 하고 어수룩했던 영호 오빠가 오늘은 처음으로 드문드문 대답도 하고 웃기도 했다고 생각하며, 다음엔 덤을 더 후하게 줘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