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그림 상납

by 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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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현철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 며칠 동안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날, 당했던 일을 생각하면 이가 갈렸지만, 안 보이니 차라리 편했다.


평온했던 날이었다. 야학에서 공부도 재미있었고 선생님께 칭찬도 받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두운 골목 끝에 현철이 서 있었다. 그를 보자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모르는 사람이다, 모르는 사람이다.


그를 매섭게 노려보던 정순은 마치 투명 인간이라도 마주한 듯 그 앞을 지나쳤다. 그 뒤를 쭈뼛거리며 뒤따라오던 현철이 어깨를 잡았다. 그러고는 정순이 손에 편지를 쥐여 주었다.


“여기‥ 네 편지‥”


정순이 제 손안에 담긴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군데군데 구겨진 자국과 번들거리는 테이프 자국. 이전과는 몰골이 확연히 달라진 편지를 보는 순간, 그간 참아왔던 모든 인내심이 단번에 끊겨버렸다.


“이딴 거 이제 다 필요 없어!”


편지를 바닥에 내던졌다. 어느샌가 그득히 고였던 눈물이 방울방울 쏟아지고 있었다.


“너를… 잠시라도 친구로 생각했던 내가… 원망스러워. 다시는 나, 아는 척하지 마라이.”


울컥 쏟아지는 울음을 삼키며, 한마디 한마디를 겨우 내뱉은 정순이 홱 고개를 돌려 그를 지나쳐갔다. 현철도 더는 붙잡을 수 없었다. 멀어지는 정순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서 있다가 내동댕이쳐진 편지를 다시 집어 들 뿐이었다.


‘아는 척하지 마라이.’


귓가에 박힌 정순의 목소리가 까칠한 사포처럼 서걱서걱 긁어댔다. 그날의 골목에는 정순이 흘리고 간 눈물자국이 차가운 밤이슬이 되어 내려앉고 있었다.



쉬는 시간, 늘 맨 뒷자리에 처박혀 꾸벅꾸벅 졸던 현철이 웬일로 몸을 일으켰다. 책상 사이에 모여 낄낄거리던 아이들 틈으로 그가 슥 다가갔다. 현철이 그중 한 놈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물었다.


“야, 너희들 우리 학교에 창석이랑 만석이라고 아냐?”


“만석이는 알겄는디? 걔가 이번 중간고사 때 1학년 전교 1등 했잖여.”


반장이 콧등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쓸어 올리며 대답했다. 현철의 미간이 좁아졌다.


“일짱이 아니고 1등? 공부를 그라고 잘한다고?”


국민학교도 못 나온 정순이. 그런 정순의 동생이 전교 1등이라니,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던 정순의 기세를 생각하면 일짱이 열 명이라도 부족할 판인데. 멍하니 생각하다 보니, 정순이 뾰족하게 성을 낼 때마다 발그레한 볼 위로 도드라지던 딸기씨 같은 주근깨가 생각났다. 하마터면 피식,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라믄 창석이는? 그림 잘 그리는 놈이라던디.”


구석에서 도시락을 까먹던 녀석이 입을 뗐다.


“혹시 상구한테 그림 상납한다는 그 애 아녀?”


상구. 아래 학년에서 질 나쁘기로 이름 깨나 난 놈이었다.

현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림 상납?”


“그림 실력이 기깔나서 상구가 죄다 거둬간다 하더라고. 그걸 한 장에 이백 원씩 파는데, 없어서 못 팔 정도라던디?”


현철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백 원이라니. 학교 앞 분식집 만두가 하나에 십 원. 만두 스무 개가 상구 손바닥 위에서 그림 한 장으로 둔갑하고 있었다.


“그림을 팔아?”


“연애편지 쓸 때 한 장씩 끼워 넣으믄 백발백중이여. 상구 그 새끼, 중앙로 해태파 형님들한테 돈 갖다 바친다는 소문이 있더라고. 그 덕에 당구장이며 만화방이며 지 세상이제.”


반장이 주변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해태 끄나풀을 누가 건드리겄냐. 상구 그 자식, 요새는 3학년들도 우습게 알더라. 우리들 복도에서도 눈 한 번 안 깔고, 어깨를 부딪치고 다닌다니께.”


저도 모르게 현철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정순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동생의 재능이 상구 같은 놈이 건달이 되는 밑천으로 전락해 있었다. 현철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해태 끄나풀...

현철이 낮게 중얼거리며 자리를 걷어차고 일어났다. 해태가 아니라 그 할애비라도 상관없었다.



하굣길, 으슥한 골목 어귀에 상구가 진을 치고 있었다. 그 앞에는 가방끈을 꽉 쥔 창석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야! 오늘은 몇 장 그려왔냐?”


“다섯 장... ”


창석에게서 그림을 받아 든 상구는 한 장 한 장 넘기며 찬찬히 살폈다.


“새끼, 그림 하나는 기가 막히네. 앞으로는 바로바로 넘겨라. 내가 이렇게 너를 기다리고 있어야 쓰겄냐?”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하지만 상구가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창석이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아직 내 할 말이 다 안 끝났는디?”


비릿하게 웃던 상구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하게 접힌 사진 한 장을 꺼내 창석의 코앞에 흔들었다.


“이게… 뭐여?”


“뭐긴 뭐냐. 내 색시지. 귀하게 얻은 거다이. 이걸로 좀 그럴듯한 그림 하나 그려와.”


상구는 바닥에 침을 카악, 뱉고는 무리와 함께 으스대며 지나쳤다.


그때 만석이 집에 가는 길이었다. 무리가 누군가를 에워싸고 있다가 순순히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그게 형이라는 걸 깨닫고 눈이 휘둥그레져 달려왔다.


“형! 지금 저 형들이랑 무슨 일인 거여?”


“아무 일도… 아니여… ”


창석이 황급히 사진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고개를 저었다.


“방금 저 형들, 그 상구 형 아녀? 형 괴롭히는 거여?”


“그런 거 아니란께. 그림 좀 그려달라고 부탁받은 거여.”


창석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앞서 걸었다. 만석은 상구 일행이 사라진 길을 보다가, 이내 형의 뒤를 쫓았다. 워낙 그림 하나는 끝내주게 그리는 형이었으니, 무서운 형들도 그림 욕심이 났을 거라 믿고 말았다.


학교가 끝나면 엄마의 시장 일을 돕는 창석이의 하루는 길었다. 늦은 저녁이나 되어 집에 들어왔다. 겨우 밥 한 술을 뜨고 나면, 온몸은 이미 물 먹은 솜뭉치마냥 축 늘어지곤 했다. 당장이라도 드러눕고 싶었지만, 책상 앞에 앉아 낮에 받은 사진을 꺼냈다.


옆 여학교에 다니는 은주였다. 국민학교 동창이라 모를 리 없는 얼굴이었다. 읍내 희망의원의 외동딸로 코스모스가 생각날 만치 가녀리고 예쁜 아이. 남학교 놈들 중에 이은주라는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은주가 상구의 애인이라고? 믿기지 않았지만 그림은 그려야 했다. 상구 옆에서 종노릇을 하는 아이들의 험악한 얼굴들이 떠올라 억지로 연필을 쥐었다.


사진을 보며 눈, 코, 입을 따 나갔다. 선 하나가 지날 때마다 사진 속 은주가 종이 위로 걸어 나오는 것 같았다. 피곤에 겨워 연필을 던져버리고 싶다가도, 제 손끝에서 살아나는 고운 모습에 창석은 저도 모르게 홀린 듯 빠져들었다.


“형, 뭐 하는디 아직도 안 자?”


공부를 마치고 누우려던 만석이 부스스 창석의 옆으로 다가왔다.


“이거 누구여? 희망의원 집 은주 누나 아녀?”


창석은 대꾸 없이 연필 끝에만 온 신경을 모았다.


“형, 은주 누나 좋아해?”


“좋아하긴... 친구가 그려달래서...”


그림을 갈무리한 창석은 사진과 도화지를 둘둘 말아 책상 한쪽에 치워두고는 그대로 자리에 대자로 누웠다.


“형, 시장 일도 고될 것인디 뭔 그림을 그라고 그린단가? 안 힘들어?”


만석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창석은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형의 대답을 기다리던 만석의 귓가에 벌써 드르렁, 창석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창석은 병든 닭처럼 비실대다 쉬는 시간이 되자 책상에 엎드려 깊은 잠에 빠졌다. 의자를 툭툭 발로 차며 깨우는 사람은 상구였다.


“야, 내가 바로바로 갖다주라고 했냐, 안 했냐? 그림 내놔!”


부스스 일어난 창석이 가방에서 둘둘 말린 그림을 꺼내자, 아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와— 이거 은주 아니냐?”


“겁나 이쁘네. 진짜 살아 있는 것 같다야!”


아이들은 저마다 탄성을 질러댔다. 상구는 잽싸게 그림을 가로채더니 아이들을 거칠게 밀어냈다.


“야, 꺼져! 이 그림 갖고 싶으믄 나한테 오백 원씩 내.”


오백 원. 명절날 큰집에나 가야 겨우 받을 수 있는 거금이었다. 졸업식에나 먹는 자장면 한 그릇이 이백 원이었으니 중학생에게는 엄두도 못 낼 큰돈이었다. 그런데도 소문은 금세 다른 반까지 퍼졌다. 쉬는 시간마다 상구에게 돈을 내미는 아이들이 줄을 이었고, 쫄따구 진철은 장부에 이름을 적느라 손목이 나갈 지경이었다.


“야야, 돈 먼저 가져오는 놈한테 먼저 줄 거니까 내일까지 챙겨와라!”


동전을 하나씩 세며 입이 찢어지게 웃던 상구가 다시 창석을 발로 찼다.


“야, 내일까지 이거랑 똑같은 걸로 열 장 그려와.”


창석의 얼굴에 암담함이 짙게 배어들었다.


“한 장도 겨우 그렸어... 열 장은 무리여.”


“지금 애들 줄 선 거 안 보이냐? 내일까지 무조건 열 장이다. 안 그라믄 알제?”


상구가 창석의 코앞에 커다란 주먹을 들이댔다. 상구 옆에는 가방 들어주는 놈부터 매일 푼돈을 갖다 바치는 놈들까지 다양했다. 창석은 그중에서도 '그림 실력'이라는 제 재능을 통째로 상납하는 중이었다.

창석은 저녁밥을 먹고도 눕지 못한 채 또 그림을 그렸다. 열 장을 채우려면 그림을 그리며 느끼던 황홀감 따위는 사치였다. 만석은 진작에 곯아떨어졌지만, 편지를 끼적거리던 정순은 아직 잠들지 않고 있었다. 동생들 방에 여태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정순이 방문을 열었다.


“창석아, 아무리 그림이 좋아도 그렇지. 여태 잠을 안 자고 있으면 어쩌냐?”


“… 조금만 더 그리면 돼. 조금만.”


창석이 멍한 눈으로 대답하는데, 정순의 비명이 터졌다.


“야! 너… 코피!”


뚝, 뚝. 창석이 공들여 그린 은주의 얼굴 위로 붉은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졌다. 정순이 부리나케 달려가 휴지를 가져다주었다. 창석은 휴지를 받자마자 그림부터 허겁지겁 닦아냈다.


“으이그! 너 코부터 닦아야지, 그림이 그렇게 중하냐?”


정순이 휴지를 말아 코에 갖다 대며 한참 동안 지혈을 해주었다. 코피를 쏟고도 그림을 그린 창석이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열 장을 채웠다. 그중 몇 장은 피가 번져 얼룩이 남았다. 하지만 그게 창석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겨우 일어난 창석은 정신이 몽롱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정말이지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몸만 쓰면 그만이었던 공사판이 차라리 그리웠다. 하지만 엄마와 누나, 제 다리를 고쳐주려 백방으로 뛰어다닌 매형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학교에 가야 했다.

창석이 교실에 들어서자, 상구가 창석의 의자에 앉아 책상 위로 발을 올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창석은 말없이 가방에서 그림 뭉치를 꺼냈다. 그림을 하나씩 넘겨보던 상구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책상 위에 올렸던 발을 바닥으로 내리며 몸을 일으켰다. 밀린 의자가 쾅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변 아이들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야, 그림 좀 잘 그린다고 봐주니까 나랑 장난하냐? 이 얼룩은 다 뭐여?”


상구는 그림을 그 자리에서 좍좍 찢어발기더니 창석의 얼굴에 내던졌다.


“이게 그림이라고 그린 거여? 영혼이 없잖아, 영혼이!”


“하루에 열 장은 무리라고 했잖아! 열 장은 절대 안 된다고!”


창석이 상구의 면상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잠이 덜 깬 걸까?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교실 안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꽂혔다. 허약한 그림쟁이의 반항에 상구의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상구의 거친 숨소리가 적막한 교실을 공포로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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