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순은 갓 지은 쌀밥과 고기반찬들을 한껏 올린 저녁상을 차렸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듯.
그러나 밥상 위, 종복의 밥과 국은 차갑게 식어갔다.
“종복이는 오늘도 늦는 갑네.”
빈자리를 슬쩍 넘어다 본 백씨는 국 한술 뜨다 말고 말했다.
“토끼 같은 자석이 있어야 저도 집에 들어올 맛이 날 것 아니요?”
백씨 할멈은 우걱우걱 음식을 넣으며 빈정대듯 말했다.
연순이는 입안에서 모래알이 굴러가는 것 같았다.
“아야, 니는 밥도 그라고 복 없게 먹는다이? 그래가꼬 삼신할매가 아나 이쁘다, 하겄다.”
할멈에게 연순은 눈엣가시였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고 혔네. 어째 화살이 거기로 간단가?”
“그라믄, 내가 시방 속이 좋겄소? 아조 며느리 하나 잘못 들여서 패가망신하게 쓰겄는디!”
“그것이 어째 연순이 탓이단가? 그놈이 일찍 일찍 들어와야제. 맨- 밖으로만 도는 것을”
“저도 우찌케든 살아 볼라고 애를 쓰는 거 아니겄소?”
할멈은 각시질이라도, 라는 말까진 차마 꺼내지 못하고 밥을 떴다.
그날 연순은 얼마 먹지도 않은 것을 체했는지 구역감이 올라왔다. 부엌에서 매실청을 따라 한 컵 마셨다. 내려가지 않은 것은 꽉 막힌 체기인지, 마음의 응어리인지 알 수 없었다.
종복은 로타리 모임이다, 고등학교 동문회식이다, 갖은 이유를 댔지만, 이제는 이유마저 없었다. 새벽녘이나 되어서 들어왔고 그의 옷깃엔 술 냄새와 함께 짙은 향수 냄새가 배어있었다.
엉망으로 취해 들어온 그는, 기다리다 지쳐 겨우 잠이든 그녀를 깨웠다.
“연순아― 이 백종복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각시, 연순아―”
온몸이 흙탕물로 젖는 줄도 모르고 풀꽃을 꺾어오던, 그때의 종복이었다.
거친 손으로 풀어헤친 그는, 연순을 그렇게 안았다.
아침이 되면 냉랭함으로 사라질 모습이었기에 연순은 그저 조용히 감내했다.
모내기 철이라 바쁜 시기였다. 종복이는 그날도 말도 없이 집을 나갔고 시부모님도 들일을 나갔다.
연순은 종복이 일하는 곳으로 새참이라도 해갈 요량이었다. 그렇게 장을 보러 길을 나섰다.
“맞지요? 백사장님 댁.”
반찬거리를 사고 있던 연순이에게 불쑥 다가온 것은 화려한 차림새의 여자였다.
그녀는 연순을 아래위로 훑었다.
진한 화장, 몸에 달라붙은 원피스, 구불구불 윤이 도는 머리카락까지.
연순은 그녀를 보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저를‥ 어떻게?”
“나, 기억 안 나요? 미스김- 그때, 화장품 갖다주러 갔었던, 아모레!”
그제야 연순은 눈앞의 여자를 기억해 냈다.
“화장품 잘 쓰고 있죠? 백 사장님이 이번에도 한 보따리 가져갔잖아-”
“아아- 네에-”
여자는 연순의 몰골을 보고는 싱긋 웃으며 지나갔다.
또각또각 그녀의 구두 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코끝에 남은 잔향이 익숙하다고 생각하며…….
요즘 정순이의 즐거움은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지난 밤늦도록 쓴 편지는 꽤 두툼했다.
편지를 보내려고 우체국에 가는 길이었다. 길 한쪽에 멀리서 보아도 건들건들한 남학생 무리가 있었다.
정순이가 못 본 척 지나가려던 참이었다.
“여어- ”
현철이었다. 정순이를 향해 튀어 나가는 현철이를 두고 주변 남학생들은 새끼손가락을 내보이며 낄낄댔다. 현철이 그들에게 장난스레 발길질하더니, 옆으로 다가왔다.
정순이는 부끄러워 귀까지 다 빨개질 지경이었다.
현철이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종종 거렸다.
“또 모르는 척?”
“건달이랑은 친구가 아니라서.”
“쳇. 이렇게 준수한 건달이 어딨다냐? 근디, 너는 어딜 가는데 그렇게 기분이 좋냐?”
저랑 눈도 마주치지 않고 걷는 정순이 귀엽다는 듯 웃으면서도, 그녀가 들고 있는 분홍빛 편지를 놓치지 않았다.
“편지… 그 멀대 꺼냐?”
“휴- 신경 끄셔-”
“그럼 내 꺼?”
“아니거든! 이 누님이, 펜-팔이라는 걸 한단다- 너는 그게 뭔지도 모르겠지만.”
“펜팔? 그거 편지 주고받는 거 아니냐?”
연필 쥐고 쓰는 데는 취미가 없는 현철이었지만, 친구들이 옆 학교 여학생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으래! 우체국에 가는데 거기까지 따라올 참이야?”
“남자야?”
현철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정순이 뜨악한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누구에게 보내는 것이기에 저렇게 발그레해졌을까, 호기심과 장난기로 범벅이 된 현철은 결국 그녀의 손아귀에서 편지를 낚아챘다.
받는 이까지 확인하자, 이맛살은 더욱 구겨졌다.
“‥ 일병 장도영? 군인? 야! 너는 무슨 노땅한테 편지질이냐?”
“얼른 내놔! 편지!”
정순이 편지를 되찾기 위해 현철이에게 내달렸다.
하지만 현철은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버렸다.
현철을 잡기 위해 내달렸지만 날쌘 그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숨이 턱까지 찼다. 둥, 둥,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하아-하-, 별 미친놈이!”
머리꼭지가 뜨끈뜨끈해져 눈물이 핑 돌았다.
‘현철’ 이라는 이름은 인생의 오점이었다.
쓰윽- 옷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그 이름을 흔적조차 남지 않도록 싹- 지워버리리라, 입술을 깨물고 다짐했다.
달리다 보니 어느덧 남산의 팔각정이었다. 뜨끈 뜨끈, 편지를 쥔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분명 정순이를 보아 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엿같다.
처음엔 분명 장난이었다. 왜 도망친 거지? 이유는 아무래도 모르겠다.
아니, 이 편지 때문이다. 색깔마저 연한 분홍빛이 도는 게 재수 없다.
보내는이... 이정순.
저도 모르게 편지를 코밑에 갖다 댔다. 희미하게 배어 나오는 향기. 꽃 냄새일까?
울렁울렁 속이 불편했다.
이까짓 편지, 없애버리면 그만이지.
그러다가 내용이 궁금했다.
뻔하디 뻔한- 사랑 어쩌고- 일 테지. 생각하니 또 머리가 핑, 핑- 돌았다.
거칠게 봉투를 찢었다. 나한테는 찬바람만 쌩쌩 도는 애가, 편지를 써?
구깃구깃 봉투를 조각 조각으로 찢어내면서 손이 자꾸 후들거렸다.
편지는 꽤 두툼했다.
편지 한쪽에는 말린 봄까치꽃과 제비꽃 한 무더기가 정성스럽게 붙어 있었다.
그 꽃을 꺾어다가 말렸을 정순이를 생각하니 입안이 썼다.
곧 군인 아저씨께, 로 시작한 편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현철의 얼굴엔 심술 맞았던 표정이 사라지고 어느덧 멍해진 동요만 남아있었다.
그저 그런 연애 나부랭이나 썼으리라 생각했던 편지 안에는 그간 몰랐던 정순이가 담겨 있었다.
긴 편지 속에서 동생들을 향한 안쓰러움과 사랑을 보았고, 엄마를 향한 고마움과 딸로서의 슬픔을 느꼈다.
낯설었다.
현철이 눈엔 귀엽고 예뻤지만, 어울리지 않게 억척스러웠던 정순이었다.
조금만 쿡쿡 찔러대도 뾰족뾰족한 성게처럼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는 게 놀리는 맛이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처음엔 분명 장난이었는데…….
맞다, 나는 늘 이런 식이었지.
그렇게 몽둥이찜질을 당해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걸 보면 완전 구제 불능인 건가.
편지를 다 읽고 나자, 현철의 머리는 더욱 터질 것 같았다.
한참을 머리카락을 쥐어뜯었지만,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수습하기엔 너무 늦어버렸을까.
정순이가 낚아채려 했을 때라도 돌려줬더라면, 이 봉투를 찢지만 않았더라도… 이 편지를 읽지만 않았어도… 아니, 정순이를 영 몰랐더라면 더 나았을까?
지금껏 수도 없이 장난을 저질러 왔던 그였다. 보통은 그깟 몽둥이찜질 몇 번이면 해결됐었다.
그러나 이번 일은 아무리 머리를 빙빙 돌려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영영 정순이를 안 볼 자신은 더 없었기에 진짜, 큰일이었다.
산에서 내려간 현철은 먼저 가게에 들러 아버지 책상에서 셀로판테이프를 챙겼다. 집으로 와서 구깃구깃 찢긴 종이조각을 하나씩 다림질했다. 엄마가 별 희한한 짓을 다 보겠다고 혀를 차며 지나갔지만 굴하지 않고 조각난 종이를 이어 붙였다.
잘 이어 붙여 보려 애를 썼지만, 편지는 이음새가 훤히 드러난 핑크빛 프랑켄슈타인이었다.
*** 하... 현철이 이 녀석을.. 어쩔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