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그저 소녀였던 밤

by 라라

저녁을 먹고 정순이 야학 길을 나섰다. 평소와 다름없는 길인데도 어색했다.

자꾸만 무언가가 발걸음을 잡아당기는 기분이었다.

골목 어귀를 지날 때마다 습관적으로 곁눈질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정순은 괜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때였다.


휘익-


익숙한 소리, 현철이었다. 그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채 다가왔다.


“그동안 잘도 피하고 다니셨겠다?”


정순이는 못 들은 척 지나쳤다.

느긋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던 현철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는 당황한 듯 꼬인 발걸음을 허둥대며 정순의 뒤를 쫓았다.


“야! 날마다 거머리처럼 붙어 있던 그 멀대는 왜 없냐?”


“거머리?”


“뭐, 둘이서 그렇고 그런 사이야?”


정순이는 기가 차서 헛웃음이 다 나왔다.


“아니거든?”


“… 그래?”


현철의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정순은 별 시답지 않은 애를 본다는 듯 뚜벅뚜벅 앞서 걸었다.

현철은 그 뒤를 가만히 따라 걸었다. 정순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회 안으로 들어갈 때였다.


“좀 이따,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현철이 소리쳤다. 정순은 그 소리를 듣고는 눈을 질끈 감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부터 원치 않는 동행이 시작됐다.
그것은 예상외로 평화로웠다. 우리 상회에서 양동이를 엎으며 훼방 놓던 녀석은 온데간데없었다. 현철은 그저 골목 어귀를 지키고 섰다가, 정순이 나오면 말없이 옆자리를 채우며 걸었다.


처음엔 귀찮은 입방아가 없어 편하다 싶었다. 하지만 며칠째 이어지는 그의 낯선 침묵은 은근히 신경을 긁었다. 차라리 전처럼 떠드는 게 낫지, 싶을 만큼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 그때 많이 혼났냐?”


“… 뭐, 몽둥이찜질에, 시장 쪽 접근 금지 정도? 누구 때문에 그쪽으론 고개도 못 돌린다. 하핫!”


웃어넘기는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왠지 입맛이 썼다.


“그런데, 너는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하냐?”


예상치 못한 질문에 정순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입술을 달싹이며 이유를 대보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순이 침묵에 빠지자, 현철이 그새를 못 참고 다시 입을 놀렸다.


“… 안 싫어하는 건가?”


애초에 대답은 들을 생각도 없었다는 듯, 현철은 익숙한 골목을 따라 휘적휘적 앞서 걸었다.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았던 웃음이 픽 터져 나왔다.


그날 밤, 이불 속에서 현철의 말을 곱씹어보던 정순의 마음이 어쩐지 가벼웠다.

녀석도 아주 못된 애는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5월이었다. 틈날 때마다 일구었던 텃밭이 모양새를 갖춰갔다.

장에서 고추, 상추, 오이 모종을 사왔다. 호미질을 해 구역을 나눠 모종을 심었다.

따사로운 봄볕 아래에서 목덜미로, 콧잔등으로 땀이 흘러내렸다.


“정순아-”


고개를 들자, 그동안 통 보지 못했던 미자가 서 있었다.

미자는 그사이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잔잔한 프릴이 달린 분홍 블라우스에, 걸을 때마다 찰랑거리는 넓은 나팔바지까지.

화사하게 화장을 마친 미자는 한껏 부풀어 오른 봄날의 작약 같았다.


“우리 미자 맞냐? 오메 이쁜그!”


“이뻐? 이번에 월급 타서 옷이랑 화장품이랑 샀거든. 엄니한테 들켜서 등짝 몇 대 두들겨 맞았지만. 괜찮냐?”


미자가 제자리에서 나팔바지 자락을 휘날리며 빙그르르 돌았다.


“으응, 너는 본바탕이 워낙 이쁜께- 쫌만 꾸며도 무슨 여배우 같구만.”


칭찬에 기분이 좋은 듯 웃던 미자가, 이내 정순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순아- 니도 인제 이런 몸빼 바지 그만 입고 좀 꾸며라. 언니가 화장품도 겁나게 줬드만, 왜 안 하는 것이여?”


그 말에 문득 손톱 밑에 잔뜩 낀 흙 때가 부끄러워 졌다. 저도 모르게 바지춤에 손을 감췄다.

미자는 그런 정순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가방 안을 뒤적여 편지 하나를 꺼냈다.


“짜잔! 이게 뭐-게?”


“편지 아니여? 무슨 편지에 장미꽃이 다 그려져 있다냐?”


“이 언니가- 펜팔이라는 것을 하고 있거덩!”


“펜‥ 팔?”


생소한 단어였다. 정순이 갸웃거리자, 미자가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편지를 써서 서로 주고받는 것이여. 접때 일하고 있었는디 군인 하나가 왔었거덩. 강진 군부대에 있다던가… 그때 자꾸 쳐다보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미용실로 편지를 보낸 거 있지?”


남의 얘기 하듯 술술 꺼내 놓는 미자의 이야기는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정순이의 심장이 마구 쿵쾅거렸다. 자기도 모르게 미자의 곁으로 바짝 다가 앉았다.


“진짜? 그래서‥ 그래서? 잘 생겼어?”


“뭐- 나는 우찌케 생긴 지는 생각도 안 나. 그냥 편지가 오니까 답장 몇 번 보내는 거지. 근데 이게 꽤 재밌더라.”


“와- 그 사람, 우리 미자한테 홀딱 반해 브렀구나?”


정순의 마음 한구석에서 몽글몽글한 솜사탕이 피어올랐다.


“정순아, 이 군인 아저씨한테 괜찮은 친구가 있다는데‥ 너도 펜팔 해볼래?”


“나‥ 나도?”


“응! 편지 쓰다 보면 국어 공부도 되고 좋지 않겄냐?”


미자의 눈빛이 더욱 반짝였다.

미자는 기다렸다는 듯 가방에서 편지지와 봉투, 우표까지 꺼냈다. 정순보다 더 설레는 눈치였다.


정순이는 깊은 밤, 홀로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았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들떴다.


안녕하세요.


수줍게 첫 줄을 적고 나자, 그 편지 속에서 정순이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뽀얀 피부에 고운 이목구비를 가진 소녀, 책을 좋아해 늘 소설책 몇 권쯤은 들고 다니는 문학소녀였다.

시작이 어려웠을 뿐이었다. 한 번 물꼬가 트이자, 이야기는 퐁퐁퐁 샘물처럼 흘러넘쳤다.

그날 정순이는 편지를 쓰며 새벽녘이 되어서까지 한참을 설렜다.


오래 걸리지 않아 답장이 왔다. 봉투를 뜯자 정갈한 글씨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글씨만 보아도 그는 다정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대학교에 다니다가 휴학했고, 입대한 지 일 년이 되어간다고 했다. 처음엔 군 생활이 힘들기도 했지만, 이제는 제법 적응이 되었다고. 그럼에도 여전히 그리운 것은 바깥의 삶이라고 했다.


공부하느라 힘들겠다는 말과 함께, 책을 좋아한다는 정순이를 떠올렸다며 소설책 몇 권을 추천해 주었다.

정순이도 그냥 소녀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펜팔은 미자 말대로 정말 설레고 재미있었다. 그 문장들은 편지를 덮고도 한동안 마음속을 돌아다녔다.


학교 앞 문방구에 들렀다 집에 가는 길이었다.

예쁜 편지지를 고르고, 답장을 쓸 생각에 절로 기분이 좋아 콧노래가 나왔다.


“정순아.”


고개를 들자, 영호였다. 교복 차림에 가방을 멘 채, 예전보다 해쓱해 보였다.


“오빠! 진짜 오랜만이네!”


정순이 활짝 웃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

영호의 시선이 잠깐, 손에 들린 편지지에서 멈췄다가 다시 그녀의 얼굴로 올라왔다.


“요즘… 잘 다니지?”


동창이라는 그 녀석과 함께 지나가는 모습을 이미 몇 번이나 보았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확인하는 순간, 편지의 주인까지 저절로 떠오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순이는 그의 머뭇거림을 느끼지 못했다.


“으응, 요즘엔 친구랑 같이 다녀.”


친구, 라는 그 말에서 영호는 쓴웃음이 나왔다.

그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애먼 가방만 고쳐 맸다.


“나 이제, 공부하러 가봐야겠다.”


정순이는 멀어져가는 그 뒷모습을 보며, 저 오빠가 공부하느라 고생이 참 많겠다고만 생각했다.




그날 밤도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편지를 썼다. 왠지 속 깊은 이야기를 하기가 더 쉬웠다.

모르면서도 내면은 가장 가까운 사람 같았다.


장사하느라 고생하시는 어머니, 그림을 잘 그리는 동생과 공부를 잘하는 동생, 노래를 잘하는 막냇동생까지 편지로 수다를 떨었다. 막힘없이 써졌다.


그러다… 언니 이야기를 꺼낼 차례가 되었다. 펜은 움직이지 못했다.

막혔다.

얼마 전 길가에서 보았던 형부가 떠올랐다.


언니는, 잘 지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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