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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호 Dec 18. 2020

봉투의 매듭을 풀며


늦은 시간 퇴근해서 집에 오니 마트 배송 상품이 와 있었다. 비닐봉지의 매듭을 풀려니 잘 풀리지 않아 한동안 매듭을 매만졌다. 매듭이 점점 따뜻해졌다. 문득 묶은 사람의 온기가 이제야 뒤늦게 전달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묶은 사람과 푸는 사람. 물건을 담아 봉투를 묶고, 봉투를 풀어서 물건을 꺼내는 사람.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대척점에 서 있는 그 누군가가 갑자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어떤 얼굴로, 어떤 기분으로
이 매듭을 묶었을까.

긴 노동에 지친 피로한 얼굴이었을까, 반복되는 일상에 표정을 잃은 얼굴이었을까. 혹은 뜻밖의 소식에 밝은 얼굴이었을까, 천성이 밝은 성격에서 유래한 미소 띤 얼굴이었을까.

늦은 퇴근에 지쳐있던 나는 왠지 전자 쪽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서글프면서도 미미한 애수가 느껴졌다.


일상 속에는 늘 앙금 같은 애수가 있다. 때론 사금처럼 분분하거나. 점토와 같이 침잠하거나. 결국 매듭은 풀리고, 비닐봉지는 버려졌다. 물건은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차가운 냉장고 속으로 들어갔다.

비록 이것이 우리 인연의 시작과 끝일지라도. 같은 마트를 이용하는 한 매듭을 묶은 사람과 매듭을 푸는 사람은 다시 한번 닿을 수 있겠지. 그때는 그 누군가의 미소 띤 얼굴을 바라지만, 그때는 나야말로 표정 없는 얼굴로 아무 생각 없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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