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출근을 산으로 하고 있지만 점심시간이 되면 식사를 하기 위해서 집과 회사를 산 아래에 있는 도로를 걸어서 오간다. 나의 집에서 회사까지 걸어가다 보면 3개에서 4개의 신호등을 만나게 된다. 어떤 신호등이 들어오느냐에 따라 3개의 신호등을 마주칠 때가 있고 4개의 신호등을 만날 때가 있다.
신호등에 빨간색 불이 들어오면 다음 초록색 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린다. 이때에 어떠한 의심도 없다. 혹시 초록색 불이 들어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이 신호등은 계속해서 빨간색 불만 들어오는 게 아닐까. 뭐 이런 의심을 하지 않는다. 나는 믿는다. 지금은 빨간색 신호등이지만 잠시 후에는 초록색 신호등이 들어올 거야 하고 말이다.
잠시 기다리니 정말로 신호등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횡단보도를 건넌다. 이때에도 나는 믿는다. 초록색 신호등이 들어왔으니까 이때에 길을 건너면 자동차가 내 앞을 지나가지 않을 거야 하고 말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든 사람들은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횡단보도를 건너도 안전할 거라는 믿음 말이다.
횡단보도를 한 번만 건너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도 여러 번 건너 다니고 있으니 내 평생 건너 다닌 횡단보도 수를 합하면 아침마다 산에 간 숫자인 2000번을 훌쩍 뛰어넘는 몇 만 번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엄청난 횟수의 횡단보도를 횡단하는 행위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호등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나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함께 항상 불안한 마음으로 길을 걷고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을 것이다.
이 보다 정말로 엄청 무지하게 더 한 용광로에서 펄펄 끓는 쇳물 같이 뜨거운 믿음이 있다.
나는 주로 걸어 다니다 보니 자동차를 탈 기회가 많지 않다. 어쩌다 자동차를 탈 기회가 생기는 경우는 지방에 내려갈 때이다. 처갓집이 부산에 있다 보니 장모님을 뵈러 갈 때는 자동차를 이용한다. KTX를 이용하여 빠르고 편하게 갈 수도 있지만 부산에 도착하여 움직이기 편하려고 처갓집에 갈 때는 주로 자동차를 이용한다.
오랜만에 자동차를 이용하여 부산까지 가기 위해서는 고속도로를 주로 이용한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교통정체가 발생하면 나의 내비게이션에서 좀 더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고 나는 내비게이션을 믿고 길을 바꾸어 새로운 도로인 국도 위를 달려서 나의 목적지로 향한다. 위에서 이야기한 용광로 쇳물 같은 뜨거운 믿음이 내비게이션에 대한 믿음이라는 말은 아니다.
국도에서의 제한 속도는 보통 시속 80Km이다. 고속도로에서의 속도 100Km보다는 느린 속도이지만 시속 80Km로 달리는 자동차를 밖에서 보면 엄청 빠른 속도이고 만약에 80Km로 달리는 자동차가 정면으로 충돌하면 사망에 이를 확률이 매우 높다.
대부분의 국도에는 고속도로와는 다르게 교행 하는 차량 사이에 오직 차선 하나 만이 있다.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운전자들은 오직 선 하나만을 믿고 수 없이 많은 자동차들과 교행 하여 내 달린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수많은 자동차들이 저 차선을 넘지 않을 거라는 강하고 뜨거운 믿음을 가지고 운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말로 용광로에서 펄펄 끓는 쇳물 같은 뜨거운 믿음이어야 가능한 일이다.
서커스단에서 하는 서커스 중에서 공 같이 생긴 둥글고 커다란 원 안에서 두 대의 오토바이가 서로 교행 하면서 운행하는 묘기를 보여주는 순서가 있다. 관객들은 이 묘기를 보면서 마음을 조리고 환호하며 박수를 보낸다. 서커스단에서 하는 오토바이 묘기는 단원들 사이에 약속을 지키고 수 없이 많은 연습을 한 후에 하는 행위이다.
도로 위에서 오직 선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교행 하는 자동차 운전자들은 생면부지 한 번도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끼리 단 한 번도 함께 연습해 본 적도 없이 하는 행위이다. 지구 밖의 어떤 존재가 시속 80Km가 넘는 속도로 오직 선 하나만을 그려 놓고 수 없이 많은 차량이 교행 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 서커스단에서 하는 오토바이 묘기를 보았다면 싱거워서 하품을 할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신호등과 차선을 절대적인 신앙으로 믿고 있다. 초록색 신호등이 들어오면 안전하게 도로를 건널 수 있다는 믿음과 도로 위에 차선을 넘어 마주하여 달려오는 자동차가 나를 덮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신호등과 차선은 사람들을 인도하고 보호하고 통제한다. 빨간색 신호등이니 건너지 말라고 초록색 신호등이니 건너가라고 차선을 그어 놓았으니 넘어가면 안 된다고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를 따르고 안전하게 평화를 누리고 살아간다.
간혹 가다 신호등이 고장 나는 경우도 있고 차선이 오염되어 잘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사람들은 이를 고치고 다시 차선을 그려서 믿고 따른다.
이러한 믿음을 저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하다. 신호등을 무시하고 건너다가 교통사고가 나는 경우도 있고 차선을 넘어와서 정면충돌을 하여 생을 달리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사고가 났다고 해서 신호등을 철거하고 차선을 지워 버리지 않고 자신의 믿음을 지켜 나간다. 그것이 안전한 사회를 유지하고 나를 지켜나가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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