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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숭깊은 라쌤 Jul 16. 2024

바야흐로 개성의 시대

<교사의 단어 수집> - 아이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자유

명 1.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2. 법률의 범위 안에서 남에게 구속되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행위.




좋게 말하면 환상의 짝꿍, 조금 안 좋게 말하면 환장할 짝꿍. 우리 반에도 있었다. 학급의 분위기를 있는 힘껏 끌어올려 주는 분위기 메이커이자, 담임의 기분을 한껏 열받게 해주는 사고뭉치 커플. 햄버거와 콜라처럼 환상의 콤비를 자랑하는 권버거군과 이콜라군이다. 

두 친구 모두 공부 머리가 뛰어나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누가 뭐래도 착실한 녀석들임은 분명했다. 권버거군은 방학 때마다 아버지 가게 일을 도와드리는 효자 중의 효자였고, 이콜라군은 음악이라는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기특한 녀석이었다. 생각해보면 내 말도 무지하게 잘 들었다. 시키지 않은 일을 할 때도 있긴 했지만 시키는 건 꼭 해냈달까? 또한 잘못해서 혼이 나면 다시 그 잘못을 반복하는 일은 없었다.      


3월 2일, 우리 반 교실에 앉아있던 두 사람은 처음엔 사실 존재감이 그렇게 크진 않았다. 그저 활발한 정도라고 알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그저 활발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정확히 한 달 뒤, 두 사람은 내게 숨겨왔던 비밀 한 가지를 꺼내 놓는다.     


“저희 타투했어요. 근데 이거 해도 괜찮은 거죠?”     


타……투? 그러니까 문신? 몸에 그림 그리는 거? 타투를 했으니 하복을 입으면 겉으로 다 보이게 될 것이라는 내용으로 이어졌고 어쩌면 이것은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지각 혹은 교복 관련 규정이야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니까 머릿속에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었지만 낯설고 어색한 단어와 연결된 규정은 좀처럼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저나 하기 전에 해도 되는지 물어보는 게 아니라 하고 나서 괜찮은지를 묻는 건 대체 무슨 심보인 거니?      

아니나 다를까 두 친구의 타투로 인해 학교에선 상벌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살펴보았더니 관련 규정도 분명히 존재했고 당연히 해선 안 되는 게 맞았다. 문제는 징계 수위였는데, 아무래도 나이가 지긋하신 선생님들께선 잔뜩 골이 나서 역정을 내셨다. 교직 생활 30년 중 이런 놈들은 처음이라며, 당장 학교에서 내쫓아야 한다며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셨다. 그런데 규정을 위반한 것은 잘못이 맞지만, 한편으론 아이들의 심정도 이해가 되기는 했다. 세상이, 바뀌고 있으니까.     


“쌤, 근데 이거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도 다 하는 거예요. 그냥 멋인데…….”

“표현의 자유, 뭐 그런 거 있지 않아요? 저희가 나쁜 짓 하려는 것도 아니고…….”   

  

단 한 마디도 아이들의 말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렇지만 틀리기도 했다. 본인들이 판단하기에 잘못된 규정이라 하더라도 일단 어긴 뒤에 그 옳고 그름을 논하는 건 순서에 맞지 않을뿐더러 아무리 개성이 중시되는 세상이어도 다른 학생들에게 충분히 공포심을 유발할 수 있는 부분이었으니까. 두 친구는 결국 타투를 지운다는 약속과 함께 추가 징계까지 받아야 했고, 나도 있는 힘껏 담임으로서 잔소리를 해주었다.     


개성의 시대. 어른들의 세상보다 아이들의 세상이 훨씬 더 빠르게 변한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아이들은 자기만의 강점을 갖기 위해 애쓰고 있으며 그건 그래야만 한다. 남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살아남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으니까. 그래서 학교도, 어른들도, 조금은 바뀔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문화를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좀 더 관대해져야만 한다. 절대 내가 경험한 나의 잣대로 그들의 세계를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아이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줘야 할 것은 그 자유가, 반드시 특정 테두리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법이면 법, 규정이면 규정, 도덕이면 도덕 안에서는 얼마든지 자유를 누려도 되지만, 선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하며 심하게는 무거운 형벌이 따를 수 있음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가르쳐야만 한다. 존중과 질책의 경계를 넘나드는 교육의 어려움이 바로 이런 점이 아닐까.     


권버거군과 이콜라군은 지금 성인이 되어 마음껏 자신들의 꿈과 끼를 발산하고 있다. 사회적 테두리 안에서 그들은 얼마든지 즐겨도 괜찮으므로, 나 역시 그들의 인생을 열심히 응원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의 상벌위원회에서의 가르침이 그들을 좀 더 나은 성인으로 거듭나게 해준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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