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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숭깊은 라쌤 Jul 19. 2024

요즘 애들이 글을 못 쓴다고?

<교사의 단어 수집> - 아이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성장


명 1. 사람이나 동식물 따위가 자라서 점점 커짐.

    2. 사물의 규모나 세력 따위가 점점 커짐.





이 시대의 아이들은 유튜브만 볼 줄 알고 책 따위는 멀리한다고 하지만 그건 정말이지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해가 갈수록 아이들의 문해력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으며 글쓰기 수준이 터무니없는 것은 물론 맞춤법 틀리는 일도 부지기수다. 

그래서일까? 갈수록 수능 국어 시험이 어려워지고 있는 요즘, 문해력에 관한 이슈가 학부모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어진다. 특히 독서, 그러니까 비문학 지문을 읽다 보면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을 때가 많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비문학 읽기를 잘 할 수 있을까? 

확실한 건 무작정 문제만 풀어대는 건 좋은 해결책이 아니란 점이다. 아주 쉽게 접근해보자. 주어진 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글쓴이의 의도, 주제 따위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우선적으로 잘 파악해야 한다. 아니 그런데, 자기 생각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이의 생각을 이해한다고? 심지어 그 생각을 파악한 뒤 문제까지 푼다고? 이건 덧셈, 뺄셈을 못 하는 사람이 곱셈, 나눗셈을 하겠다고 덤벼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모든 일엔 순서, 과정, 단계가 있는 법이니.

국어 교사의 관점에서 설명하자면,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는 결국 모두 연결되어 있기에 오직 읽는 행위만으로는 읽기가 완성되지 않는다. 읽기의 완성이란 주어진 정보를 내 것으로 체계화시키는 데 있기 때문이다. 물론 ‘누구네 집 아들내미는 문제만 주야장천 풀어서 성적이 이만큼이나 올랐대요!’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누구네 집 아들내미는 어려서부터 문해력을 갖추기 위한 노력을 이어왔을 수 있다.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능력은 절대 아니란 점도 꼭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말이다. 모든 아이가 문해력 결핍을 보이는 건 아니다. 책을 꾸준히 읽으며 글도 웬만한 수준 이상으로 쓰는 학생들도 적잖이 있다. 문제는 아이들이 가진 잠재력을 밖으로 끄집어내 주지 못하는 어른들이다. 나 역시 그런 존재였지만,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선배 교사들 덕분에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해낼 수 있었다. 그들에게 얻은 가장 큰 가르침은 ‘장 場을 마련해주기만 하면 아이들은 마음껏 뛰놀 수 있다는 점’이었다. 

고등학교 국어 수업, EBS 문제집만 풀어대는 지루한 시간을 떠올릴 수도 있겠으나 경기도의 어느 작은 학교에선 ‘시 경험 쓰기’라는 조금은 낯선 수업이 이뤄졌다. 아이들이 직접 챙겨 온 시집을 읽고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을 고른 뒤 그 시와 관련한 자기 경험을 솔직하게 쓰는 활동 수업이다. 그리고 덩치는 산만 하지만 절대 성격이 산만하지는 않은 우리의 매력남, 홍감성군의 글을 소개한다.     


이 이야기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벌써 8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나는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나의 아버지는 롯데마트 해산물 코너를 총괄하는 일을 하셨다. 이 일이 일어나기 몇 주 전 아버지는 송파구로 발령이 나셨다. 용인에서 송파구로 출퇴근을 하기 위해 아버지는 5시 40분에 나가야만 했다. 

학원이 끝나고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대화하던 중 나도 모르게 “아빠는 왜 이리 비린내가 나?”라고 물었다. 순간 아버지의 입은 닫혔고,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그 후로 아버지와 일주일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엄청난 상처를 받으셨던 것 같았다. 그날 아버지는 방에서 나오지 않으셨고, 안방에는 조용한 울음소리만 계속 흘러나왔다. 당시의 나는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제 와서 생각해보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오랜 출퇴근으로 심적으로 많이 힘드셨을 텐데, 나는 그 앞에서 가시돋은 말을 뱉어 버린 것이다. 이때 아버지께 진정으로 필요했던 말은 “수고했어요”, “감사해요”, “사랑해요”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그 속도 모르고 나는……. 이를 계기로 아버지의 사랑과 희생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후부터 아버지의 짐을 덜어 드리기로 다짐했다. 덕분에 많이 힘들 때는 서로 눈물을 보이기도 하고, 기쁜 일에 대해서는 서로 웃음을 나눴다. 원래 둘 다 성격 자체가 무뚝뚝하고 마음에 힘든 일들을 담아두는 편이었지만, 그 후로부터 서로의 짐을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이제는 언제 서로의 도움이 필요한지를 잘 안다. 그 어떤 좋은 말보다 수고했다는 짧은 한마디가 내 마음의 고민과 걱정을 녹여버리곤 한다.     


홍감성군은 정일근 시인의 <아버지의 등>이란 시를 읽고 이 경험을 떠올렸다. 뛰어난 문장력? 화려한 수식어? 그런 걸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의 글엔 무엇보다 아버지를 향한 솔직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진심을 드러내는 행위, 이것은 어쩌면 모든 배움의 시작점일지 모른다. 이걸 하지 못하면 어떠한 것도 체화할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자기 속내도 정리하여 드러내지 못하는 이가 다른 이의 가르침을 내면화한다는 것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그저 시험 문제를 잘 풀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좋은 어른으로 성장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이야기이다. 그러려면 문제집을 푸는 행위뿐 아니라 삶 속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물음에 답할 수 있도록 미리 장 場을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진짜 어른의 세계와 부딪히기 전, 문학이라는 연습 무대를 제공해주자는 하나의 ‘제안’이다.     


그리고 기왕이면 어른과 아이의 ‘함께 읽기’를 추구해보았으면 좋겠다. 학교에서는 읽기 수업을 할 때 아이들에게만 강제로 텍스트를 읽게 하지 않는다. 교사 역시도 소설이나 시집을 들고 아이들 앞에서 함께 읽는다. 그리고 그 읽기의 끝엔 반드시 ‘나눔’이 있다. 나누다 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데, 그 ‘보임’에는 그저 텍스트 속 숨겨진 의미만 있는 게 아니다. 다름 아닌 아이들! 아이들의 감춰져 있던 내면이 훤히 드러남으로써 그간 몰랐던 면들을 새로이 알게 된다.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아이는 어떤 아이다, 하고 명확히 규정지어 놓았었는데 그것이 모두 틀렸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랄까? 아이들의 세계는, 실로 무궁무진하다는 걸 깨우치게 된다.     


아이들의 성장을 도모하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어른의 성장을 도모하는 것과도 같다. 몰랐던 혹은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을 명확히 확인하는 시간일 테니까. 지구인은 어쩌면 죽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해서 자라나는 것일지도. 


정말 그런 것이라면, 매일매일 지구인 모두 키가 자라서 저 우주 끝에 도달하기를! 자라나라, 머리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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