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단어 수집> - 아이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탓
명. 1. 주로 부정적인 현상이 생겨난 까닭이나 원인.
2. 구실이나 핑계로 삼아 원망하거나 나무라는 일.
국어 수업은 정말 즐겁고 유익하다. 물론 이것은 교사의 일방적인 입장일 수 있겠으나 명백한 사실이긴 하다. 왜냐면, 매년 새로운 정보가 폭풍처럼 쏟아지기 때문이다! EBS 교재를 제작하고 모의고사, 수능 문제를 출제하는 모든 분께 이 자리를 빌려 경의를 표한다. 교사 생활 내내 끊임없이 성장하게 해주는 고마운 분들이니까.
<유씨삼대록>이라는 고전 소설을 공부하면서 역시나 ‘국어 외적인’ 지식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방어기제’라는 개념이었다. 물론 대학 시절 벽돌처럼 두꺼운 교육학 교재에서도 다뤄지고 있긴 했지만 이제 가르치는 입장이 되니 훨씬 더 상세히 들여다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덕분에 굉장히 흥미로운 이론임을 깨달았다.
인간이란 존재는 자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속이거나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방어기제라고 한다. 그러니까 거짓말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거짓말은 의식적, 방어기제는 무의식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므로. 방어기제의 구체적 방법으로는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주로 부정, 합리화, 투사 등을 이야기한다.
첫 번째, 부정. 말 그대로 일단 그 상황을 거부함으로써 심리적 상처를 줄이는 방법이다. ‘내가 대학에 떨어졌다고? 그럴 리 없어, 아닐 거야!’라는 마음의 소리와 같은 거랄까.
두 번째, 합리화. 못 갖는 것의 가치를 낮추고 가진 것의 가치를 높이는 방식인데, 아마 이런 것 아닐까? ‘S대? 그 학교 별로야. 합격시켜줘도 어차피 안 가!’
자, 그리고 마지막은 투사. 투사는 결국 쉽게 말하면 ‘남 탓하기’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이 공부 못 하는 이유로 학교 탓, 선생님 탓, 심지어 머리를 나쁘게 낳은 부모님 탓을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아마 언젠간 조선시대에 활동하신 조상님 탓도 하게 되지 않을까.
빙 돌아왔지만 결국 ‘남 탓’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남 탓. 학생 중에는 잘못에 대해 지적을 했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죄책감을 느끼기보단 일단 투사, 그러니까 환경적 요인을 들먹이거나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녀석들이 있다.
모든 학교가 같은 방식으로 운영하진 않겠으나 지금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선 자율학습 시간 내 전자기기 사용에 관해 꽤 관대한 편인데, 학습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엔 최대한 허용해주고 있다. 단, 학습 용도가 아닌 사용 쉽게 말해 게임을 한다거나 동영상 시청 등의 행위를 하다가 적발되면 그에 따른 처벌도 이뤄진다. 하필이면 업무 담당자여서 적발된 학생 몇몇을 불러 사실 확인서를 작성하게 하였는데 어라, 아이들이 작성한 내용에서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는 게 아닌가.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쉬는 시간에만 잠깐 게임을 하려고 했는데 타종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학습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친구에게 메시지가 와서 확인했던 것뿐입니다.’
와 같은. 내가 기대했던 건 ‘반성합니다’ 혹은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그치겠습니다’와 같은 문장이었는데 말이다. 별것 아닌 걸로 씁쓸함이 반복되는 교사의 삶은 실로, 고달프다.
사실 이러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남 탓’하는 학생들이 최근 2~3년 새 급격히 늘어났단 것이다. 내가 기대했던 문장을 말하는 것을 넘어 푹 숙인 고개, 축 처진 어깨, 일그러진 표정 등 비언어적 메시지까지 함께 담아내던 아이들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분명 존재했다. 심지어 우리 반 반장이었던 박경찰군(이 친구는 현재 경찰공무원이다)은 자기 잘못이 아님에도 학급 친구들이 일으킨 문제가 모두 자기 탓이라며 혼자 벌을 받기도 했다. 대체 그동안 이 지구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코로나19를 겪으며 학생들의 학력이 저하되었다고 하는데 그것만 떨어진 건 아닌듯하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난, 지금, 내 탓을 하려 한다. 이 이야기를 나의 ‘투사’가 되도록 할 순 없다! 아이들 탓을 뭣 하려 하겠는가. 아이들이 방어기제로써 투사를 사용하여 남 탓이나 하게 만든 교사들의 책임이니까, 이들을 바르게 지도하는 건 어른들의 역할이니까, 결국 나의 탓인 셈이다.
아이들은 알아서 잘 크기도 하겠으나 좀 더 나은 성장으로 이끄는 건 결국 어른들 몫이란 생각이 든다. 잘못을 반성하고, 뉘우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아이들도 곧잘 따라 하지 않을까? 옳은 일을 행하고 진실을 들려주어야 아이들이 성장한 뒤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 있어 확실한 분별력을 갖추게 되지 않을까?
남 탓을 하는 대신 반대로 ‘내 탓이오’를 외칠 수 있는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하여 앞으로 ‘투사’ 대신 나 자신과의 ‘사투’를 펼쳐보려 한다. 기필코 싸워 이김으로써 지구의 모든 청소년에게 귀감이 되고야 말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