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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숭깊은 라쌤 Oct 22. 2024

모든 관계가 ‘가족’으로 연결될 수 있다면

<교사의 단어수집> - 아이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관계


명. 둘 이상의 사람, 사물, 현상 따위가 서로 관련을 맺거나 관련이 있음. 또는 그런 관련.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흔히 ‘우린 한 가족이다’라고 말하는 관리자들의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어느 집단이든 그때마다 콧방귀를 뀌는 구성원들이 한둘쯤은 있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러하다. 가족은 무슨, 가족한테 이따위로 한다고?     

대한민국엔 유독 ‘유사 가족’이 많다. 진짜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그 정도로 깊은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가짜 집단’이 많다고나 할까? 가족이란 이유로 손해를 감수하라 말하고 가족이란 이유로 과오를 눈감으라 말하며 가족이란 이유로 그저 모든 걸 참으라고 한다. 적어도 직장 상사와는 가족이 될 수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다.


가족이라면, 다른 구성원에게 내 책임을 떠넘기거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다. 절대 내가 잘되기 위해 가족을 이용하지 않으며 오히려 내 뼈와 살을 깎아 구성원들을 위해 내어주고자 하는 게 진짜, 가족이다. 물론 ‘진짜’가 아니라 ‘유사’이기에 그 정도까지를 원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적어도 마음가짐은 비슷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과도한 업무로 지쳐있지는 않은 지, 건강은 괜찮은지, 그 정도도 신경 쓰지 않으면서 가족을 운운하다니. 지금 이 글을 적는 순간에도 자꾸만 또 콧방귀가 터져 나오는걸 제어할 수 없을 지경이다. 자, 그럼 흥분은 가라앉히고 ‘이게 정말 가족이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던 행복했던 경험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처음으로 고3 담임을 맡았던 해였다. 안 그래도 입시가 어렵고 힘든데 수시 모집이란 제도가 확대되면서 고3 담임이 정말 고3만큼 어렵게 여겨지던 시기였다. 게다가 하필 그해 수시 모집 접수 기간이 추석 연휴와 겹치면서 부모님께는 명절에 찾아뵙지 못하게 되었다는 통보를 드려야 했다. 먹고 즐길 여유란 없었으니까. 대한민국에서 명절이 갖는 의미,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담소를 나누며 행복을 공유하는 시기. 그 연휴 기간에 장가도 못 간 총각 선생님은 낮엔 학교로 출근해 학생들과 상담을 하고 밤엔 8평 원룸에서 혼자 쓸쓸하게 업무용 노트북을 열어 이 학교 저 학교의 모집 요강을 공부해야만 했다. 그런데 말이 ‘쓸쓸’이지 절대 쓸쓸하진 않았다. 공부할 게 많았고 무엇보다 너무 어려웠다. 한 학생당 쓸 수 있는 수시 원서는 여섯 장. 우리 반 서른다섯 명의 미래가 이 원서 한 장으로 달라질 수 있었기에 한 명 한 명의 전략을 위한 치밀하고 치열한 사투를 벌여야 했다. 애초에 쓸쓸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달까?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어차피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었으므로 귀찮았지만 끼니를 해결하긴 해야 했다. 그래도 명절인데 비슷한 분위기라도 내보자, 싶어 마트에 장을 보러 갈 참이었는데 그때 막 휴대폰이 격하게 요동쳤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여보세요?”

“쌤, 지금 어디세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야무지고 똑 부러지는 성격을 지녀 학생회장까지 했던 김똘똘양. 명절 연휴에 갑자기 무슨 일로 연락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쌤 학교 근처에 살지 않으세요? 오늘 학교도 출근하셨다고 들어서요. 혹시나 해서…….”     


누구한테 들었는지 내가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고 있다는 것과 명절임에도 그 자취방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까지 모두 알고 있었고, 괜찮으면 학교 앞에 잠시 나와 주실 수 있냐는 물음도 이어졌다. 어차피 장을 보러 나가려던 참이었으니까, 뭐. 그렇게 불과 5분 뒤 정문 앞에 모여 있는 세 친구, 김똘똘양과 그녀의 절친들인 서똘망, 이똑똑양을 만났다.      


“뭐야, 너희 명절인데 여기서 뭐 해?”

“저희 고3이라 명절에도 독서실에서 같이 공부해요. 잠깐 각자 집 가서 저녁 먹고 다시 나온 거예요.”     


그렇구나, 고3에겐 명절은 사치구나. 그나저나, 그래서, 나는, 왜?     


“쌤 혼자 사시잖아요. 각자 집에서 먹을 것 좀 싸 왔어요.”     


이, 이게 무슨 말인가. 정말이었다. 각자의 손엔 명절 음식들이 한껏 들려 있었다. 자기네 선생님 가져다드린다고 각자 어머니께 부탁드려 음식을 싸 온 것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감동 그 잡채’!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에서도 맛볼 수 없을 최고의 식사를 선물 받았다. 난 그들에게 ―끼니를 거르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하나의, 가족이었다.     


십 년이 채 지나지 않았으나 이젠 아이들과 끼니에 관해 공유하는 그런 사이가 되지는 못한다. 나도 나이를 먹었고, 고새 세상도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모든 관계가 ‘진짜 가족’으로 연결될 수 있다면 얼마나 이 세상이 따뜻할까, 하는 상상은 해볼 수가 있다. 말로만이 아닌 진심으로 연결된 소중한 관계를 직접 경험해보았으니까. 그 온기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내가 유사 가족을 믿지 않듯 나 역시도 타인에게 가족이 되어 줄 자신이 없으면서 괜한 말로 그들을 속이지 않으려 한다. 가족이랍시고 괜히 서로의 희생과 배려를 기대하게 될 테니. 다만, 온기가 필요한 이들을 먼저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족까진 아니더라도, 그저 좋은 관계를 맺을 수는 있는 거니까. 밥은 차려주지 못해도, 밥을 먹었는지 걱정은 해줄 수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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