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단어 수집> - 아이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어른
명.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요즘에 누가 연필을 쓰냐고 한다면 정말이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도 연필은 쓰지 않는다. 연필은커녕 펜을 쥐고 글을 쓰는 행위조차 굉장히 드문 일이 되어버렸다. 거의 모든 작업은 컴퓨터를 이용한다. 심지어 요즘 아이들은 수업 시간 선생님의 판서를 받아적는 ‘노트 필기’를 하지 않는다. 선생님이 수업을 마치면 그대로 태블릿으로 사진을 찍고, 그걸로 나중에 복습하는 식이다. (그래서 판서를 아주 잘해야만 한다. 증거로 남게 되니까!)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다. 결국엔, 사라진다. 지구인 모두 영원히 우주를 거닐고 싶어 하겠지만, 우리도 역시나 마찬가지이다. 소멸하고, 기억에서 지워질 테지. 그렇지만 ―역시나―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묵묵히 버티고 버텨내는, 그래서 어떻게든 소멸을 늦춰내는 위대한 존재들이 있기 마련이니! 그는 바로 낭랑하고 낭랑한 18세, 황연필군이었다.
연필군은 언제나 묵묵히 선생님의 판서를 자신의 노트에 옮겨 적었다. 그것도 어디서 주워왔는지 모를 ―마치 내 다리 길이처럼― 짧디짧은 몽당연필을 쥐고서 말이다.
언제나 연필군을 보면 당연하다는 듯 연필이 떠올랐다. 절대 새로운 문화에 대한 부적응자가 아니라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사랑스러운 10대로서 말이다. 말수가 적은 듯하지만 가만 보면 은근 장난도 많이 치고 특히 가장 친한 친구와 단둘이 있을 땐 수다쟁이 모드가 발동되는 연필군. 한창 떠들다 갑자기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면 감춰두었던 오랜 비밀을 들키기라도 했다는 듯 깜짝 놀라 스스로 입을 막아버리곤 했다. 뭔 사내자식이 ―구릿빛 피부에 외모도 아주 성숙한 자식이― 이렇게 귀엽고 난리니? 하여간에 연필군은 시골 청년과도 같은 순박함을 지닌 학생이었다.
그런데 한동안 연필군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던 때가 있었다. 그가 가진 특유의 미소는 어디로 숨었는지 찾아볼 수 없었고, 친구들의 장난을 좀처럼 받아주지도 않았다. 매일 얼굴을 맞대고 지내는 사이가 되면 누구나 알게 된다. 한숨을 쉬면 그 한숨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눈빛으로 뿜어지는 감정의 종류는 무엇인지 말이다. 속내를 훤히 드러내진 않아도 표정만큼은 늘 밝았던 그였기에 참으로 걱정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으므로 연필군, 점심 먹고 교무실로 컴언 컴언!
연필군의 고민은 무엇이었을까? 성적? 교우관계? 아니면 부모님과의 갈등? 세상에, 연필군도 남자는 남자였다. 아니지, 한창 이성에 관심이 많을 나이이긴 하지. 좋아하는 이성에게 마음을 드러내는 것, 그러니까 그는, 짝사랑, 중이었다! 그런데 그가 펼쳐낸 고민은 듣고 보니 마냥 귀엽게 여길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연필군이 좋아하는 여성은 ―조금 독특하게도― 서른한 가지 맛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에서 일하는 점원 누나였다. 당신은 여기서 순정만화 속 주인공을 떠올릴 수도 있겠으나 다시 말하지만 연필군은 동화 속 주인공과 같은, 그러니까 백마 탄 왕자님의 이미지는 아니다. 그래서였을까? 얼굴도장도 찍고 좀 더 심리적 거리를 좁히기 위해 가게에 종종 찾아가곤 했는데, 이게 역효과가 난 모양이었다. 연필군의 순수한 짝사랑은 아뿔싸, ‘흑심’으로 치부되어 있었다. 마치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마음에 품기라도 했다는 양 연필군이 가게로 들어가면 수군수군하는 소리가 그의 귓가를 때리는 바람에 마음이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물론 실제로 연필은 흑심을 품고 있다. 흑심? 사전적 정의만 봐도 참 부정적 의미가 강하다. ‘음흉하고 부정한 욕심이 많은 마음’. 차마 그 마음의 장면을 구체적인 문장으로 형용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런데 정말, 연필의 흑심은 그 내면까지도 새까만 상태일까? 그저 드러내지 못하고 감춰둔 속내, 혹은 부끄러워 표현하지 못한 누군가를 향한 소중한 마음까지도 모두 흑심인 건 아니다. 마음이라는 건 꺼내 열어보기 전까진 그 참된 빛깔을 알아차릴 수 없는 법. 연필의 흑심이 겉으론 까맣더라도, 속은 알고 보면 러브러브 핑크빛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알고 보니, 결국 이건 다 어른들 탓이었다. 당신도 들어보았을 것이다. 딸뻘밖에 안 되는 카페 아르바이트 여학생들에게 걸핏하면 데이트 신청을 하는 4, 50대 남성들이 존재한다는 소식을. 이게 최근에서야 부각된 이야기가 아니다. 오래전부터 알게 모르게 공공연하게 벌어졌던 일이다. 그러니 아르바이트생들은 낯선 이의 관심에 부담을 느꼈을 테고 연필군의 마음이 흑심으로 여겨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순수한 면을 지녔다. 그리고 이건 지구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우린 모두 학창 시절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으며 소년의 풋풋한 사랑에 감동하지 않았었던가! 그런데 아이들의 순수함을 파괴하는 건 ―다시 말하지만― 바로 우리, 어른들이다. 다들 변해버렸다. 지금 어른이 된 이들의 일상에 순수함을 연결할만한 무언가가 없다.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미움, 시기, 질투, 사기, 범죄, 다툼, 폭력……. 지금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배우며 살아가는 중일까. 우리는, 나는, 잘 살아가고 있기는 한 걸까?
다행히 연필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본래의 밝은 얼굴을 되찾았다. 사랑의 아픔은 시간이 모두 해결해준다고 위로해주었을 뿐인데 정말 시간이 약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이가 들어 성인이 된 연필군이, 마음껏 누군가를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으리라 믿는다.
세상의 모든 짝사랑이 사라져 지구인 모두가 행복해질 때까지, 모든 어른이 어른의 책임이 무엇인지 깨달을 때까지, 우리가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되찾을 때까지 연필은, 끝까지 소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냐고? 그건…… 사랑은 뭐니 뭐니 해도 연필로 써야 제맛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