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단어 수집> - 아이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언젠가
부. 미래의 어느 때에 가서는.
“선생님 꿈이 뭔지 알아? 언젠가 반드시 노벨문학상을 타는 거야.”
자, 이렇게 이야기했을 때 아이들의 반응은 어떠할까? 비웃음? 코웃음? 아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이것은 실제로 이 글을 쓰기 30분 전 2교시, <심화 국어> 수업 시간 3학년 4반 교실에서 내가 했던 말이고 반응도 실제 반응이었다.
아이들에게 늘 이야기해왔다. 적어도 10대라면, 꿈은 크게 가져야만 한다고. 나도 책 한 권 출간해보는 게 소원이었던 때가 있었고 결국 해냈다는 걸 아이들도 알기에, 그래서 이 말이 먹힌다. 그런데 정말 내 꿈이 노벨문학상 수상이긴 하다. 언젠가 꼭 해내고야 말리라!
사실 내 얘기보다도 더 잘 먹혀드는 건,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이다. 그때 얘가 이랬는데 지금은 이렇게 됐어, 와 같은 이야기를 떠들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는다. 좀 더 집중해서 공부하겠다는, 마음가짐이 태도에 반영된 행동이랄까. 특히 고무협군의 사례를 들려주면 아이들의 눈빛마저 초롱초롱 밝게 빛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눈빛마저 반짝이도록, 고무협군의 지난 나날들을 들려줘 볼까?
무협군의 외양 묘사부터 해보자. 키가 작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피부마저 뽀얀 무협군은 누나들의 사랑을 독차지할만한 귀여운 미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무협군은 학교에서 존재감이 없었다. 늘 도서관 구석진 곳에서 무협지를 읽는 독서광이었으므로. 조용한 곳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유영하는 무협군에게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다. 뭐, 그걸 무협군이 원하지도 않았겠지만. 문제는, 무협군이 학교생활 자체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데시벨이 높은 학교라는 공간은 무협군의 세계에 편입되지 못했다. 공황장애에 시달렸고, 학교를 빠지는 날이 하루하루 늘어갔다.
결국 학부모님들과 무협군까지 함께 상담 시간을 가졌다.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했으니까. 그때, 생각지도 못한 무협군의 취미생활에 관해 알게 되었다.
“선생님, 이것 좀 보세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이거, 얘가 쓴 거라네요. 허참, 기가 막혀서.”
어머님께서 내민 휴대폰 화면엔 무협군이 집필하는 웹소설이 펼쳐졌다. 당연히 장르는 무협지. 도무지…… 읽기가 힘들었다. 장르적 특성이 나와 맞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예 형편없는 초등학생 수준도 안 되는 글이었다.
“이런 글 쓰는 게 재밌어?”
“저 무협지 작가 될 거예요.”
물음을 듣자마자 돌아온 답에 그 자리에 모인 나머지 ―나를 포함한― 어른 셋은 저도 모르게 콧방귀를 꼈다. 싹이 보여야 물도 주고 거름도 주고 할 텐데, 자라다 썩어 버릴 게 뻔한 일에 무조건 응원만 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그것도 좋은데, 더 나은 글쓰기를 하려면 배움도 있어야지. 문창과나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하면 전문적인 글쓰기도 배울 수 있어.”
최대한 마음이 상하지 않게, 더불어 학업을 유도하기 위한 나의 말에 무협군은 자기 글이 ‘선생님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어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란 식으로 답했다. 그리고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무협군은 자퇴 신청서를 제출하고 학교를 떠났다.
몇 년이나 지났을까. 비 내리는 어느 오후, 아파트로 이사한 것을 축하하며 대학 동기가 보내 준 화분 속 거북 알로카시아가 메말라 죽어있음을 확인했다. 내다 버리려다 다른 식물이라도 사서 심어야겠단 마음에 말라버린 줄기만 뽑아 버렸다. 그리고 정확히 2주 뒤, 그 화분 속에선 새로운 싹이 솟아났고 더 크고 무늬가 선명한 새로운 거북 알로카시아가 탄생했다.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던 무협군이 다시 등장한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 무협군은 자가용을 끌고 학교에 찾아와 내게 정중히 인사했다. 한 손엔 과일주스 한 상자도 들려 있었고.
“선생님, 저 기억하시죠?”
어느덧 성숙해진 그의 얼굴엔 거뭇거뭇한 수염도 자라 있었다. 무엇보다 무협군은, 웹소설 계에서 꽤 알려진 인기 작가가 되어 있었다. 이름만 말하면 알 수 있는 유명 사이트에 오랫동안 연재를 하고 있으며 번 돈으로 집도 사고, 차도 샀다는 이야기까지, 다 듣기에 흐뭇한 소식만 가득했다.
“맨날 읽고 쓰고 했더니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지 알겠더라고요.”
무협군의 글을 처음 봤던 그때, 그는 그저 입문자에 불과했던 것인데 그것만 보고 마치 미래를 예지하듯 모든 판단을 해버리고 이미 누군가 닦아놓은 길만이 정답인 양 떠들었던 게 모두 나의 과오였음이, 여실히 드러난 순간이었다.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으므로 열이면 열 다 꿈을 이루고 살 수 있는 건 아닐 테다. 부모의 마음은 자녀가 늘 순탄한 길로만 걷길 바라는 게 당연할 테고. 그런데 아이가 정말 온 힘을 다해 싸워내고자 한다면, 그때만큼은 함께 싸워주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자기 꿈을 이룬 아이의 모습은 얼마나 찬란하게 빛날지를, 그걸 상상해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