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전야

건축소설 COMPETITION #13

by 글쓰는 건축가

어느덧 마감 전날이 되었다. 박진호 도시건축 사무소는 며칠 전부터 어느 때보다 분주해졌다. 아니, 분주하다기보다 다들 자리에 앉은 망부석이 되었다는 게 적절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며칠째 밤늦게 집에 들어가고 있어서 팀원들의 피로도가 굉장히 높아졌다.


저녁 무렵, 최예린이 전화를 받는다.

“어? 오빠? 무슨 일이야? 아.. 근처라구? 오늘은 나가기가 좀 힘든데.. 어떡하지? 내일이 마감이라.. 뭐? 이리로 온다구?”

정수현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게 느껴진다. 뭐?오빠라구? 예린이한테 오빠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있었나? 그새 남자친구가 생긴 건 아니겠지?


“예린아, 무슨 일이야?”

“아.. 제 친오빠가 근처에 왔다구 해서요. 요즘 집에 워낙 늦게 가고 있으니 걱정이 됐나.. 잠깐 온다구 하네요.”

음.. 친오빠가 있었구나. 하기야 예린이가 막내라고 했으니 오빠가 있을 법도 하지. 정수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쉈다.


“오빠, 아 거기 맞아. 우리 회사 처음이라 헷갈리지? 잠깐만.. 내가 나가볼게.”

양 손에 이것저것 먹을 걸 든 덩치 큰 사내가 사무실로 들어선다. 최예린과 분위기가 사뭇 다른 것이 슬램덩크의 채치수와 채소연을 보는 느낌이다.


“아이고, 뭐 이런 걸 다.. 예린이 오빠시라구요? 요새 일이 많아져서.. 매일 늦게 보내서 죄송합니다.”

박교수가 나서서 손님을 맞이한다.

“아, 아닙니다.. 저야 결혼해서 나와 사는걸요. 부모님이 걱정이시죠. 지금 일이 끝나서 돌아가는 길에 잠깐 들렀습니다. 다들 힘드시죠? 많이 바쁘시겠지만 이것 좀 드시고 하세요.”

“그래, 잠깐이라도 먹고 하자. 이제 슬슬 마무리 해야지. 수현아, 너도 와서 좀 먹어.”

“그래요.. 아 수현씨? 예린이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대학교때부터 친구라면서요?”

“예.. 예린이가 제 얘길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네요.. 하하. 잘 먹겠습니다.”

잔뜩 긴장한 정수현이 간식이 차려진 테이블로 다가선다.

“킥킥. 수현아 우리 오빠 강력계 형사야. 화나면 진짜 무서워~”


어쩐지 풍채가 범상치 않더니만.. 형사라니. 정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 드는게 느껴진다.

“얘는 뭐 그런 얘길 하고 그래.. 에이, 부담 가지지 마세요. 그런데 저희 예린이는 정말 잘 대해주셔야 합니다. 여기서 어떤지 모르겠지만 집에선 워낙 귀한 막내딸 이라서요.. 제가 어릴 때부터 집적거리는 놈들 혼내준 적도 정말 많거든요. 하하.”

왠지 정수현에게도 ‘너도 쓸데없이 집적거리다가는 혼날 줄 알아라’ 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 오빠 고마워. 안 바쁘면 이야기 오래 할텐데. 일찍 보내서 미안하네. 그리고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인데.. *현상설계라서 여기서 본 건 정말 비밀로 해줘야 돼, 알지?”


*현상설계 안은 다른 경쟁사나 심사위원이 알면 심사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보통 보안을 중요시한다.


“얘는 내가 괜히 경찰인줄 알아. 그런 것도 모를 줄 알고. 그리고 나 같은 놈이 이런 거 봐도 뭐가 뭔지도 몰라.. 하하. 그래, 예린아 바쁜 거 아는데 너무 무리하지 말고. 힘내고 내일 제출하고 연락 줘. 다들 힘내세요!”


예린이 오빠를 보내고 나니 저녁 10시가 다 되어간다. 이제 정말 막바지 정리를 해야 할 시간이다. 박교수가 집에 들어가면서 팀원들을 챙긴다.

“내가 더 있어봐야 크게 도움이 안 될테니.. 이만 들어갈게. 내일 새벽에는 출력 날려야 되니까 출력소 체크 한번 더 하고. 시간 되면 욕심 버리고 출력하자. 내가 볼 때 지금 그냥 출력해도 큰 무리 없는 수준이지만.. 각자 작업하는 사람들은 더 잘 마무리하려는 욕심들이 있겠지. 암튼 다들 수고해. 강소장, 마무리 잘 해줘.”

“저도 막차 끊기기 전에 가려구요. 하하. 오십 넘으니까 밤새는 것도 못하겠네요.”


그렇게 고참들이 12시 즈음 들어가고 보고서 팀과 패널 팀만 남았다. 새벽 1~2시는 가장 힘든 시간이다. 아무도 말이 없고, 틀어놓은 음악만 계속 흘러나온다.


“아.. 진짜 힘들다. 이제 몇 시간 뒤 면 끝나긴 하는 건가..”

정수현이 기지개를 켜며 말한다.

“그럼. 거의 다 했어. 이제 몇 페이지만 손보면 보고서 끝나.”

“뭐 CG도 소소한 것들 다듬는 수준이라.. 수경아, 패널은 어때?”


패널 담당 한수경이 말이 없다. 뭔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 같은 느낌이다. 최예린은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수경아, 왜 그래? 낮에 패널 목업 출력 잘 됐잖아? 교수님도 다 좋다고 오케이 하셨고..”

“차장님.. 파일이.. 파일이 날아간 것 같아요..”

“응? 파일이 날아갔다고?”


정수현도 뭔가 사고가 터졌다는 걸 느꼈다. 한수경의 컴퓨터 옆으로 팀원들이 모여든다.

“왜 그래 수경아. 패널 파일이 날아갔어? *백업파일 만들어지지 않아? 그리고 몇 시간 단위로 저장 잘 하잖아.”


“그게.. 무의식적으로 같은 파일을 계속 덮어쓰고 있었나 봐요.. 다른 이름으로 파일을 저장했어야 하는데.. 마지막으로 저장한 파일이 오류가 나서 아예 열리지가 않아요...”

“수경아,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해보자. 다들, 각자 컴퓨터에서 패널 최종 파일 열어보자.”


*보통 CAD나 그래픽 프로그램들은 날아갈 것을 대비해서 자동으로 백업(BACK-UP)파일을 만든다.


다들 하는 일을 멈추고 최종 패널 파일을 열어본다. 하지만 파일 자체에 오류가 났는지, 어느 컴퓨터에서도 열리질 않는다. 열리는 마지막 파일을 찾아보니 3일 전에 저장한 파일이다. 최종으로 작업한 파일과 너무 차이가 난다.


최예린은 순간적으로 너무 당황해서 멘붕(멘탈붕괴)이 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 이걸 어쩌지.. 과장님, 소장님들 다들 퇴근하셨는데.. 이 상황을 내가 어떻게든 수습해야 하는데. 새벽 4시네.. 출력소에 7시엔 보내야 하고.. 3시간 남았네. 나도 보고서 마무리가 덜 끝났고..’

“지금 새벽 4시에요. 출력소 보내는 데 3시간정도밖에 안 남았어요.”

“그..그래. 종민아.. 하.. 이걸 어떡하지.. 수경아 다시 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한수경은 완전히 정신이 나가서 훌쩍훌쩍 울고 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흑흑...남은 시간엔 못할 거 같아요.. 시간이 너무 없어서.. 어떡해요.. 어떡해요.. 흑흑...”

팀원들 모두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와중에, 묵묵히 앉아있던 정수현이 일어선다.


“수경아, 패널은 내가 어떻게 해볼게. 패널 최종 출력됐던 거 회의실에 붙어있지? 그거 좀 뜯어와 줘.”

“수현아.. CG 다 된거야?”

“솔직히 지금부터 CG 퀄리티 올려봐야 티도 안나. 지금 거 최종으로 가도 돼. 나 이런 상황 많이 겪어봤어. 하루 밤 사이에 패널 보고서 다 한 적도 있어. 나 혼자서. 지금은 소스도 다 있고, 그냥 하면 돼. 나한테 줘.”

“아무리 그래도.. 3일전 파일이라 새로 백지부터 레이아웃 다시 다 짜야 돼. 패널이 에이 원(A1) 4장이나 된단 말이야.”

“지금 어물거릴 시간 없어. 그냥 내가 하게 해줘. 다들 빨리 움직여야 돼. 수경아, 내가 텍스트 정리한 거랑 소스랑 좀 서포트 해줘. 어느 폴더에 있는지 다 모르니까. 그만 울고. 괜찮으니까.

경민이는 내가 말한대로 CG 포토샵 리터치만 조금 더 해줘. 얼른 하자. 수경아 최종파일 뭐야?”

한수경이 울먹거리면서 정수현 옆에 앉는다.

“예.. 이 파일이에요.”

최예린은 정신이 아득해지면서도 다른 방법이 생각나질 않는다. 지금은 정수현을 믿어보는 수 밖에..


정신없이 두 세시간이 지나갔다. 최예린은 자신의 작업을 하느라 정수현이 어떻게 하는지 볼 시간도 없다.


“와.. 벌써 다 해가네요..? 선배님 도대체 얼마나 빨리 하시는 거에요?”

한수경의 목소리가 들린다. 최예린은 믿기지가 않는다. 벌써 다 했다구?


“정말? 벌써? 어디 좀 봐 바..”

정수현의 모니터를 보니 어느덧 패널이 꽉 차서 완성되어 보인다. 사실 아무리 패널이 있는 소스로 레이아웃 하는 정도의 작업이라지만.. 두 세시간만에 백지상태에서 이걸 만들어 내다니.. 게다가 심지어 원안보다 레이아웃이 더 좋아 보인다!


“선배님 원래 것 보다 이게 더 좋아 보여요.. 어떻게 순식간에 이렇게 하실 수가 있죠?”

“나 밥 먹고 이것만 한 사람이야. 그리고 아까 회의할 때 말은 안했지만 이런 레이아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7시에 출력 보내야 되니까 빨리 마무리하자. 여기 나머지 텍스트랑 좀 쳐서 넘겨줘. *핀 번호 이런 것도 빠뜨리면 절대 안 되니까 니가 좀 챙겨주고..”


*핀 번호(Pin Number): 패널, 보고서 등에 붙이는 참가번호. 알파벳과 숫자 등을 조합해서 만든다. 참가자의 신원을 드러내지 않고 심사하기 위한 장치다.


최예린은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는다. 정수현이 빠르다, 잘한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거의 초인의 경지(?)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7시가 되어 최종적으로 패널, 보고서 가출력을 해본다. 최예린이 볼 때 이제 출력소에 넘겨도 될 것 같다.

“자, 이제 출력소 *웹하드에 올리자. 이 정도면 된 거 같아. *가출력도 다 잘 나왔으니까.. 다들 수고했어. 힘들겠지만 종민이가 이따 출력소에 전화 하고 좀 가 줘. 일단 집에 가서 한 두 시간이라도 쉬고 가던지.. ”

“아니에요, 차장님. 지금 집에 갔다간 그냥 뻗어버릴걸요.. 그냥 사무실에 좀 있다가 갈게요. 그나저나.. 수현이 형은 정말 대단하네요.. 어떻게 그렇게 빨리.. 당황하지 않으셨어요?”

“야.. 나도 힘들어.. 말시키지 마라.. 지금 완전 하얗게 불태웠다..”


*웹하드: 인터넷 상에서 데이터를 수령하기 위한 시스템

*가출력: 최종출력을 하기 전에 미리 확인하기 위해 해보는 출력


한수경이 어렵게 말을 꺼낸다.

“선배님..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흑흑..”

“수경아, 다 그런 일 겪을 수 있어. 잘 마무리 했으니까 된 거지. 괜찮아. 앞으로 파일 관리 잘 하고.. 아무리 이런 일이 생겨도 절대 당황하면 안 돼. 오늘은 내가 했지만.. 누가 널 커버해 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니가 책임져야 맞는거야. 알았지?”

“예 선배님.. 흑흑..”


최예린은 정수현이 없었으면 어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생각해본다. 최소한 최예린이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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