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출

건축소설 COMPETITION #14

by 글쓰는 건축가

아침이 되자 박교수를 비롯한 고참급들이 출근하기 시작한다. 김종민, 한수경 등이 이미 출력소로 패널과 보고서 등을 찾으러 떠났다. 최예린과 정수현은 만일에 사태에 대비해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수현아, 예린아. 고생 많았네. 최의실에 있는 패널이랑 보고서 가출력 봤는데.. 밤새 패널이 훨씬 좋아졌던데? 어제도 충분히 좋긴 했는데.. 어떻게, 더 해본건가?”

“아.. 예. 제가 CG가 좀 일찍 끝나서 수경이 도와서 같이 좀 바꿔 본거에요.”

“으음. 역시. 수현이 같이 해줬구나. 수고 많았어. 진짜 좋아졌더라구.”


최예린은 새벽의 그 난리통을 설명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만둔다. 어쨌든 결과가 좋았으니까 다 좋은 거겠지. 일부러 알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애들 출력소에 가서 보고 있는데, 잘 나오고 있다고 하구요. 점심시간 전에는 제본이랑 다 끝날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챙겨서 제출하면 될 것 같아요. 5시까지 제출이니까.”

“그래. 니들이 서류 같은 거 잘 챙겨주고.. CD 나 자잘한 것들 있지?”

“예, 지금 CD 만들고 있고.. 예린이는 적당히 하고 집에 가서 쉬어. 나랑 애들이랑 갖다 내면 될 것 같은데..”

“아니야. 내가 한 거니까 내는 것까지 끝까지 보고 싶은데.. 이따 같이 가자.”

“그래, 그럼 적당히 쉬다가 같이 다녀 오든지. 아무튼 다들 너무 고생했어. 제출하면 바로 들어가서 쉬어. 오늘 금요일이니까 주말 잘 쉬고. 월요일날 하루 더 푹 쉬고 와 다들. 그동안 고생했으니 하루 정도 더 쉬어야 피로가 풀리지.”

“예, 알겠습니다 교수님.”


점심시간 즈음해서 출력물들이 다 나오고 최예린과 정수현이 출력소에서 팀원들과 합류했다.

“음. 다 잘 나왔네. 얼른 포장해서 제출하러 가자. 아직 시간 넉넉하지?”

“예. 이제 12시니까요. 밥 먹고 가면 될 것 같아요.”

“그래도 출력이 잘 나오니까 기분이 좋네.”

“진짜 우리가 될 것 같지 않으세요? 진짜 잘 한거 같아요.”

“너무 설레발 치지 말고.. 수백팀이 내는 거니까.. 그래도 정말 됐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제출 장소는 기무사 현장이다. 최예린 등이 택시에서 내리자 이미 건물 앞은 제출하려고 온 설계사무소 사람들로 분주하다. 다들 한 꾸러미씩 들고 삼삼오오 모여들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정수현이 말했다.

“쳇, 좀 덜 내려나 했더니.. 진짜 많이들 해가지고 왔네.”

“괜찮아요. 저희 안이 제일 잘 했을 거에요.”

“그래, 종민이 말이 맞아. 우리 안에 자신을 가져도 돼.”


접수를 맡은 직원이 친절하게 제출물을 받는다.

“음.. 패널.. 보고서.. 참가확인서.. 사무실 사업자등록증.. 건축사 자격증.. 다 됐네요. 고생많으셨습니다. 접수됐습니다. 돌아가셔도 됩니다.”

이렇게 제출을 마쳤다. 이제야 정말 현상설계가 마감된 기분이다.


“야.. 진짜 끝났다. 어제 오늘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어. 수경이 덕에 더 스펙타클 했다 그지? 하하.”

“야, 정수현. 그만해. 수경아 괜찮아. 다 잘 냈으니까.”

“얜, 장난인데 뭘 또 그렇게 정색을 해.”

한수경은 아직도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어, 예린아.. 아.. 정수현도 있네? 박교수님 사무실도 잘 낸거지?”

문재민이 멀리서 다가온다. 대 여섯명의 팀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아.. 재민아. 너희도 잘 낸거야? ”

“응, 방금 내고 나오는 길이야. 우리는 *254번이네. 참.. 많이도 냈네.”

“우린 231번이야. 비슷비슷하구나.”

“어때, 잘 한거 같아?”


*접수번호를 뜻한다. 보통 접수한 순서대로 번호를 매긴다.


“뭐, 그럭저럭.. 우리 사무실 캐파(capability, 능력치를 뜻하는 말)로는 이 이상 하긴 힘들것 같긴 해. 너흰 어때?”

“음.. 감히 우리 이상 한 팀은 아마 없을 것 같다고 할까. 하하하. 농담이고. 그 정도로 자신 있긴 해. 정말 잘 나온 것 같아.”

예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는 어디 가지 않는다. 정수현은 최소한 우리가 너희보단 잘 나왔을 거라고 말하고 싶지만 참는다.

“어얼.. 역시. 재민이 자신감은 어디 안 가는구나. 피곤하겠네. 어제 밤 안샜어?”

“뭐 한두 명은 새긴 했지. 난 막차 즈음에 들어가서 쉬고 나오는 길이야. 실제 작업은 한 일주일? 전에 거의 마무리 됐어. 우린 마감을 좀 여유 있게 하는 스타일이거든.”


저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진 모르겠지만.. 정수현은 묵묵부답 듣고 있다.

“그래. 그래도 다들 피곤하겠다. 우리도 며칠 동안 무리해서. 이제 들어가서 쉬어야지. 재민아 고생했어. 결과 잘 나왔으면 좋겠다.”

“너희도. 고생 많았네. 나중에 결과 나오면 서로 안 보여주고 하자고. 잘 들어가고.”


“네.. 네. 교수님. 잘 제출했습니다. 231번이니까 벌써 200명 넘게 냈고 지금도 내고 있네요. 300팀은 넘게 낼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네. 잘 쉬시구요.”

박교수와의 통화를 끝낸 최예린이 팀원들에게 말한다.


“그래. 이제 진짜 집에 가자. 다들 너무 고생했어. 교수님이 주말이랑 월요일까지 쉬고 나오라고 하시네. 그 정도 했으니까 하루 정도 더 쉬어도 돼. 얼른 들어가자.”


이제 정말 끝인 건가. 정수현은 갑자기 공허함이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만약 당선이 된다면 이 사무소에서 계속 일을 하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 사실상 오늘이 이 사무실에서 일하는 실질적으로 마지막 날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마 송별회 비슷한 회식 같은 것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예린아. 그동안 정말 고생했어. 오늘로 난 사실상 마지막이네. 다음 주에 짐 빼러 갈게.”

“어, 수현아. 왜.. 당선되면 계속 할 수도 있잖아.”

“에이. 야. 저 많은 제출하러 온 사람들을 봐. 우리가 될 가능성은.. 하하. 나도 물론 됐으면 좋겠지만.. 정말 희박하다고 보는 게 맞겠지. 예린아, 그 동안 정말 고마웠어. 너 아니었으면 이 사무실에서 적응하고 일하기 정말 힘들었을 거야. 내가 삐져서 안 나왔을 때도 붙잡아준게 너였고.. ”

“벌써 그런 말 하지 마. 최소한 결과 나올 때 까지는 사무실 나와야지. 결과 나오고 회식도 해야 되고. 결과 발표 얼마 안 남았어. 다다음주인가 그래.”


정수현은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듯 하면서도 차마 말이 안 나온다. 뭐랄까 최예린을 더 이상 못 볼거라고 생각하니 벌써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오는 느낌이다.


“그래.. 오늘은 피곤할테니까.. 일단 들어가자. 주말 잘 쉬고.”

“그래, 수현아. 일단 잘 쉬어. 어젠 진짜 고마웠어. 어제 너 아니었음 진짜 큰일 났을거야. 너무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나였으면 너처럼 대처하지 못했을걸..”

“에이. 그런 상황은 내가 이골이 나서 적응을 해버린 거고.. 사실 그런 상황을 안 만드는 게 제일 좋은 거지.. 미국에서 그런 극한 상황을 너무 많이 겪어봐서. 더한 것도 해봤지.. 아무튼. 이런 자랑은 문재민한테나 어울리는 것 같고.. 이제 정말 들어갈게. 잘 쉬고.”

“그래. 수현아. 잘 가.”


정수현은 지하철을 타고 꾸벅꾸벅 졸면서 집으로 향한다. 얼른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과 이제 이 팀을, 정확히는 최예린을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뒤섞여 복잡 미묘한 기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마감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