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건축가들 혹은 직원들끼리 이런 말을 자주 하게 된다. ‘잘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쉽게 말해 건축가들의 전반적인 디자인 수준이 올라가서 상향 평준화 되었다는 말이다. 사실 이 말도 어찌 보면 참 아이러니다.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건축을 하겠다는 사람은 점점 줄고 있는데 잘하는 사람은 점점 많아진다니...
내가 볼 때 이것은 각종 디자인 정보와 툴에 대한 접근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건축 디자인을 하겠다는 사람이 줄긴 했어도 열정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어차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만 하는 판이기 때문이다. 요새는 인터넷, 구글, 유투브를 통해 원하는 정보와 디자인 트렌드, 시공 방식에 대한 정보를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인스타, 핀터레스트만 들어가도 요새 유행하는 카페 인테리어 사진을 차고 넘치도록 모을 수 있다. 건축주들도 이런 것들을 잔뜩 모아서 오기 때문에 누가 건축가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이런 상황인데 디자인한다는 어느 누가 유행에 뒤쳐진 건축을 하겠는가.
사실 이전 글에서 밝혔지만, 최근의 건축 경향은 인테리어 디자인에 기반한 감각적인 것들이다. 딱히 이유나 논리가 존재하지 않고 ‘예쁜 건물’이면 모든 게 통용되는 시대다. 인스타 등의 sns에 올려지고 이미지로 향유되는 휘발성 강한 디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디자인이 유행을 주도하고 있고 서두에 말했던 소위 ‘잘하는 건축가’들이 이런 것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나는 젊은 건축가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이런 어휘들에서 식상함을 넘어 약간의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다. 아치로 둥글게 만든 벽체나 창호, 깔끔하게 쌓아올린 벽돌, 영롱쌓기 등의 쌓기 방식을 통한 포인트 주기, 합판을 이용해 따듯한 감성을 주는 가구 디자인, 금속재질을 이용한 얄쌍한 후레싱이나 난간 디테일, 벽체를 둥글게 처리하면서 간접등으로 포인트 주기 등등등.. 사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많은 분들이 어떤 느낌인지 알 것이다. 이러한 느낌을 너무나 많은 건축가들이 공유해서 사용하고 있다. 쉽게 말해 A, B, C가 아니라 A, A', A''... 이런 느낌이다.
물론 예전 세대에도 유행하는 조류는 있었다. 승효상이나 민현식이나 비슷한 느낌 아니냐 라고 하면 나도 할 말 없다. 하지만 최소한 다른 것을 해보고자 하는 시도는 있어야 한다고 본다. 너도 나도 이런 느낌을 내려고 하니, 다들 'ONE OF THEM'이 되어버리는 느낌이다. 이래가지고는 또 하나의 ‘잘 하는 사람’이 되어도 ‘ONE OF THEM'이 될 뿐이다.
난 이런 현상의 원인을 소위 ‘집장사’의 영역 혹은 ‘인테리어’의 영역에서 일을 찾을 수 밖에 없는 젊은 건축가들의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용적률 게임에서 ‘풀(FULL)'로 찾아먹을 수 밖에 없는 이런 시장에서 시도할 수 있는 것은 메스를 가지고 노는 게 아니고 껍데기를 가지고 노는 수준에 그칠 수 밖에 없다. 이미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적 여건을 갖춘 하이엔드 건축주들을 상대하지 않는 이상 이런 다소 피상적인 접근의 한계를 떨쳐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즉, 젊은 건축가들의 약진으로 인해 건축가라고 할 수 있는 직업군의 중간층이 매우 두터워졌고, 이로 인해 소위 디자인을 지향하는 건축가의 시장이 집장사의 영역까지 확장되긴 했지만 할 수 있는 시도는 한정적이었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당장 이루어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지향점은 있어야 한다. 이전 글에서 나는 그것 중에 하나를 ‘단순함 속의 단단함’이라는 키워드로 표현했다. 오늘 꺼내고자 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DESIGN-LESS'이다.
아까 열거했던 그런 디자인 어휘들은 너무나 자주 반복되어 과잉이라고까지 여겨진다. 그런 디자인들은 유행을 반영할 뿐이지 건축가의 생각이나 철학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런 곁가지 같은 디자인들을 배제하고 본질과 정수만 남긴다면, 공사비는 절약하면서 오히려 남들과 다른 건축을 할 수 있지 않을까(그 본질과 정수가 단순함 속의 단단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건축주의 요구나 의도를 좀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보면 디자인을 안한 것 같아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그것이 디자인이 되는 것이다. 이마트의 ‘노브랜드’와 비슷한 접근이다. 브랜드를 제거해서 거기에 끼어있는 거품을 제거하는 것이다. 사실 노브랜드 자체도 또 다른 브랜드이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덩그러니 텅 비어있는 벽을 견디지 못한다. 뭐라도 포인트를 주어야 할 것 같고 하다 못해 액자라도 걸어야 할 것 같다. 그것이 디자인인 것 같다. 하지만 사실 비어있는 것 자체가 벽의 본질이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을 좀 내려놓아도 좋지 않을까.
그와 비슷한 생각으로 ‘DUM-HOUSE’라는 키워드를 생각해보았다. 말 그대로 멍청한 집이다. 장식과 디자인을 계속 덜어내다 보면 DUM HOUSE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건축가의 본질적인 철학이 담긴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뭔가 남들과 다른 집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가 나의 생각이다. 물론 이것이 제대로 건물로 구현된 것도 아니고, 아직은 생각만 있는 상태이다. 누군가는 ‘그런 너도 지금까지 유행에 맞춘 건물을 하지 않았느냐’라고 물어볼 수 있다. 거기에 대해서 변명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런 목표를 향해서 설계를 하고 있고, 언젠가는 만들어낼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아직 40이면 해볼 만한 시간이 꽤 남아있는 편이니까. 언젠가는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