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저번 학기에 설계 스튜디오를 가르칠 기회가 있었습니다. 10년 가까이 실무를 하다가 학교로 돌아가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꽤나 흥미로웠고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학생들의 신선하고 참신한.. 때로 말이 안되는 시도들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구요. 잘하는 친구는 잘 하는 친구대로, 그보다 좀 떨어지는 친구는 그만큼 어떻게든 더 잘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잘 하는 친구는 아무래도 걱정이 좀 덜 되었습니다. 조금 헤매더라도 ‘저러다가도 어떻게든 수습해서 진도를 잘 빼겠지’란 믿음이 생겼거든요. 아무래도 좀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속도가 느린 친구들이었습니다. 지금 속도로 보았을 때 그대로 쭉 진도를 나가더라도 제대로 마감을 할지 의심스러운데, 뭔가 문제가 생기거나 고민할 만한 것이 생기면 거기에 걸려 진도를 잘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면 가뜩이나 늦은 진도를 더 쫓아가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럴 경우엔 언제든지 카톡을 보내서 물어보든지 인터넷 강의를 해서 보강을 신청하라고 했지만, 사실 대학 강의에서 그 정도 적극성을 보여주는 친구는 드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잘하는 친구들이 더 적극적이어서 더더욱 격차가 벌어지는 느낌이 나곤 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설계 수업을 진행하면서 작업 속도가 늦은 것이 고민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설계 수업을 위해 준비할 것들은 정말 많습니다. 도면, 모형, 3D모형, 판넬, 보고서 .... 물론 다 해내기 버거운 것들임에는 분명하지만, 중요한 것은 잘 해내는 친구가 있고 제대로 못하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제가 학생들을 보면서 느낀 것은, 작업 속도가 느린 친구들이라도 설계 수업 준비를 위해 쓰는 시간이 결코 짧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친구들보다 진도가 늦어서 ‘수업 준비는 제대로 했는지’ ‘설계 수업 준비를 위해 몇 시간이나 쓰는지’를 물었을 때 대충 한다고 대답한 친구는 거의 없었거든요. 물론 거짓말이 조금 섞였거나 과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친구들은 밤 늦게, 혹은 새벽까지 준비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것밖에 못했느냐 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시간을 이렇게 해야 하나 저렇게 해야 하나 하는 식으로 고민하고 지우고 다시 그리고 다시 만들고.. 하는 식으로 헤매다가 보냈다는 대답을 자주 들었습니다.
전 학생 시절에도 그렇고, 회사를 다니면서도 ‘손이 빠르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뭔가 진도를 빼고, 결과물을 도출하는 시간이 짧다는 의미인데요. 전 가끔 제가 왜 손이 빠를까를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이 손이 빠르다, 는 의미는 진짜로 프로게이머처럼 다른 사람보다 손이 빠르다는 의미일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손이 빠르다는 의미는 결정을 빨리 하고 고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작업 시간을 축내는 가장 큰 적은 ‘고민’과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작업 속도를 빠르게 하는 방법은 대충 짐작이 가실 겁니다. 바로 작업할 때 고민을 줄이고 단순히 작업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한 노하우는 대충 아래와 같습니다.
1. 우선 평소에 작업 아이디어를 미리 생각해둡니다. 수업 시간에 크리틱을 들으면서 바로 하는 것이 좋고, 최소한 정신이 말짱(?)한 낮에 해둬야 합니다. 굳이 스케치북에 스케치를 하지 않아도 생각으로만 해도 좋습니다. 밤에 제대로 시작하면 그 때 생각해야지..하면 이미 늦습니다. 왜냐하면 밤이나 새벽에는 정신이 흐트러져서 생각이 잘 나지 않고 고민이 많아지기 때문이죠. 정신을 집중하기 힘든 심야시간이나 새벽에는 단순 작업만 할 수 있도록 ’생각하는 작업‘을 미리 해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음 수업시간에 어떤 방향으로 작업을 해가야 겠다는 계획이 작업 전에 미리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2. 작업은 보통 저녁에 시작하게 됩니다. 물론 낮부터 하는 게 이상적이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저녁부터 하게 될 때가 많죠. 저도 그랬습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작업을 시작하면서 내일 수업 시간에 보여줄 분량, 목표를 설정합니다. 우드락으로 만든 개념 모형과 개략 도면 하나를 교수님께 보여드린다..는 식입니다. 이 목표가 없으면 ‘되는 대로 하지 뭐..’라는 식으로 막연해지기 때문에 결국 아무것도 못하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전 학생들에게 ‘한 판’을 만들라고 강조했습니다. 일단 단선이라도 좋으니 하나의 평면 계획을 끝까지 완결 짓고, 그것을 모형이나 스케치업으로 완성한 ‘한 세트’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도면을 그리거나 모형을 만들 때 ‘이것보다 다른 아이디어가 좋을 것 같은데..’라는 식으로 다른 생각이 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적용하지 말고 ‘킵(KEEP)'해두고, 일단 하던 작업을 마무리 하십시오. 새로 떠오른 아이디어가 좋다고 그걸로 다시 시작하면 마무리를 못해서 이도 저도 안될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밤이나 새벽에 떠오른 아이디어는 아침에 보면 이상하고 말도 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낮에 생각해둔 아이디어로 끝까지 밀어붙여서 ’한 판‘을 우선 만드십시오. 그것만 다 해도 시간을 다 써버려서 새벽이 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3. 이렇게 한 시간 한 시간의 설계수업을 충실히 해 나가야 합니다. 중간에 아프다는 핑계, 혹은 다른 이유로 설계수업을 빼먹으실 수 있습니다. 한 두시간이야 별 거 있겠어..라는 식으로 그렇게 보내실 수 있지만, 사실 한 학기 수업 회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대략 석달 반 정도인데, 한 달을 4.5주라고 치면 16주 정도가 되고 설계수업은 32번 정도입니다. 이 중에 중간, 기말 크리틱을 빼면 30번 정도가 되네요. 이 수업 한 두 번이 당시에는 작아 보이지만 쌓이면 굉장히 큽니다. 한 학기 전체의 진도를 가늠하시고 나름의 데드라인을 설정하십시오. 마감 한 달 전에는 전체 계획을 마친다, 마감 두 주 전에는 판넬을 시작한다..는 식의 계획이 필요합니다. 전 계획적인 것도 많이 지도해드리려고 노력했지만, 달력을 펴고 스케줄 관리하는 방법도 최대한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막연하게 생각하지 마라, 사실은 시간이 이거밖에 없고 이 시간 안에 이걸 해야 하고 이 시간 안에 이걸 해야 하고..라는 식으로 시간감각, 현실감각을 익히도록 지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사실 건축설계에서는 설계 그 자체보다 마감을 제대로 하느냐가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작업을 완료해야 하고, 그 시간 안에 최대한의 퀄리티를 뽑아내야만 합니다. 시간을 초과한 계획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많은 친구들이 좋은 계획을 하고도 시간이 모자라서 제대로 마무리를 못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게으르거나 불성실해서가 아니라 작업 방식 혹은 태도가 잘못되어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습니다. 이 글은 제가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자주 했던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적어본 글입니다. 설계 수업을 준비하시는 많은 학생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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