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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건축가 Jul 22. 2021

개소 파티

건축소설: 내 집을 지어보고 싶습니다# 01

빌라 사보아, 르 꼬르뷔제: 근대건축을 상징하는 주택. 르 꼬르뷔제가 주장한 근대건축의 5원칙이 녹아있는 설계로 유명하다. 건축학도라면 누구나 공부해본 주택의 교본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 




‘SNOW ARCHITECTURE'


민영은 커다란 방화 철문 가운데 어색하게 간판을 붙여본다. 오늘부터 ‘건축가 설민영’의 설계 사무소, 건축사 사무소를 개소하는 1일 차가 되는 것이다. 


‘그래, 힘내서 해보자. 아직은 일이 없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민영은 혼자서 마음을 다잡아 본다. 아무도 없이 휑한 사무소.. 덩그러니 놓여있는 책상과 컴퓨터, 도면과 책 몇 권, 벽에 붙어 있는 건축사 자격증. 지금 민영이 가지고 있는 전부다.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같이 하기로 한 동반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오롯이 민영 혼자서 앞으로의 일들을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이다.


‘우울한 생각 하지 말자. 우선 오늘 애들이랑 수다 떨면 기분이 좀 나아지겠지.’


들고 온 커다란 마트 가방에서 몇 가지 음식들과 와인을 꺼내 본다. 오늘은 친한 친구들이 모여 민영의 개업을 축하해주기로 했다.


“어머, 그래도 잘 꾸며놨네~ 설 소장님 개업 축하해~! “ 


약속한 시간이 되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친구들이 들어온다. 민영의 대학 동기들로 둘도 없는 친구들이다. 이지혜는 대형 설계사무소의 실장으로 일하고 있고 김지민은 1군 건설사에서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모두 사회 경력 7~8년이 되어가는, 30대 초반의 여성들이다.  


“그래도 이렇게 시작하게 되니 얼마나 다행이니. 난 이도 저도 안 돼서 예전 사무실로 다시 돌아가야 하나 했어.”

“그래도 민영이가 마음 단단히 먹었으니 이 정도라도 한 거지 뭐. 김준수 그 나쁜 놈 생각만 하면..”


“.. 그 얘긴 그만 하자..”


민영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진다. 


김준수. 민영의 예전 남자 친구다. 민영보다 3살 연상인데, 예전에 다니던 설계사무소에서 만나 사귀게 되었고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되었다. 두 사람이 함께 건축사 시험을 준비했고 2년 동안 주말마다 학원을 오가며 데이트도 못하고 같이 고생했다.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건축사 시험을 합격하면 같이 사무소를 열자고 약속한 것이다. 민영은 두 사람의 미래를 생각하며 죽을 각오로 공부했다. 매일 야근에 시달리면서도 꼬박꼬박 제도판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날이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두 번의 시험을 쳤고 운 좋게 두 사람이 동시에 합격했다. 민영은 ‘이제 남자 친구와 결혼하고 설계사무소를 꾸려 가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같이 다니던 설계사무소의 소장님을 찾아가 퇴사 의사를 밝혔고, 소장님은 아쉬워하면서도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해주었다. 그렇게 미래를 꿈꾸고 있던 어느 날..


준수가 갑자기 딴 소릴 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 다 불안정한 설계사무소에 올인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한 사람은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면서 경제적인 기반을 닦아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직장에 다니면서 정 바쁘면 자신이 휴일에라도 도와주겠다고 했다. 일견 듣기에 틀린 말도 아니었다. 처음엔 남자의 책임감이란 게 이런 건가.. 싶기도 했다. 자신의 꿈보다는 아내와 가족의 안정을 위하는.. 민영은 준수의 말을 믿기로 했고, 준수는 몇 달간을 더 준비하여 00 공사 시험에 합격했다.


사실 몇몇 공기업들은 시설 유지를 위하 건축사 자격증을 지닌 사람들을 채용한다. 준수는 그것을 노린 것이었다. 훨씬 더 좋은 연봉과 안정적인 직장, 여유 있는 생활이 보장되어 있었다.


사실 그때 민영은 기뻐하면서도 내심 불안한 마음이 커지고 있었다. 이 남자가 도통 ‘이제 결혼하자’는 말을 꺼내질 않는 것이었다. 답답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지만 바빠서 그렇겠지, 아직 새 직장에 적응이 안돼서 그렇겠지 하고 마음을 다독이고 있던 그때..


“민영아, 미안하다.. 새 여자가 생겼어... 새 직장에서 만난 여잔데.. 나도 이제 좀 안정적인 여자랑 살고 싶어 졌어. 그동안 같이 고생하고, 기다려준 너한테 차마 할 말은 아니지만..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어.. ”


이게 무슨 소린가. 이때까지 뒷바라지해주고 같이 고생한 여자 친구를 두고 새 여자라니.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욕을 한 바가지 하고 뺨이라도 때리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이 없었다.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았다. 민영은 그렇게 힘없이 돌아섰고, 준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새 여자에게 떠나버렸다. 가끔 들리는 소식으로는 날을 잡았고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민영은 주저앉아서 울고 싶었지만 마냥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왕 시작하기로 한 거니 혼자서라도 해보겠다고 독하게 마음먹었다. 결혼 자금으로 조금씩 모아둔 돈으로 사무실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럴싸한 곳에 사무실을 낼 정도의 돈은 아니었다. 후보지는 계속 변두리로, 변두리로 밀려났다.


그러다 자리를 잡은 곳이 이곳이다. 서울 00구 변두리의 어느 주택가. 사실 지하철역에서도 꽤 멀어서 신경 써서 찾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 골목이다. 하지만 이 정도라도 어딘가. 민영은 감사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민영이는 야무지니까 무슨 일이든 잘할 거야. 그래도 뭔가 들어오는 일 없어? 아님 조금씩 물어보는 사람이라도 없고?”


“... 지금은 전혀 없어. 내가 무슨 기반이 있어야지. 부모님이 부자인 것도 아니고.. 사실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이거라도 해보자고 시작한 거지 뭐..”


두 사람은 측은하게 민영을 바라보았다. 지혜와 지민은 결혼을 한 상태고, 지민은 아이까지 있었다. 몇 년 동안 준수만 바라보다 세월 다 가버리고, 배신당하고, 마지못해 혼자서 사무실을 연 민영이 측은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힘 내 민영아. 어떻게든 될 거야. 요새 조그만 현상설계 같은 것도 많이 나오구, 여성 건축가들에게 할당되는 현상도 있다고 하니까.. 여기저기 잘 찾아보면 일이 있을 거야. 구청에서 지정하는 감리 일도 있다던데.. 난 대형사라 잘 모르지만.”


“응, 맞아. 허가권자 지정 감리라고.. 나도 일단 신청해보려고. 뭐라도 일을 해야 하니까..”


“민영이 너 아직 어머니랑 둘이 살지? 어머니 아직도 식당일 하시니?”


“응, 아직 똑같이 하고 계셔. 나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밤늦도록 나누다 10시쯤 되자 지민이 일어선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친정 엄마가 아기 봐주고 계신데.. 얼른 가야겠다. 애들아, 미안해.”


“아냐, 아냐. 얼른 가봐야지. 그래, 지혜도 들어가. 늦었네.”


“그래. 오늘은 이쯤 하자. 힘내 민영아, 또 놀러 올게.”


두 사람은 민영과 헤어지고 큰길까지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눈다.


“에구, 어떡하니. 애가 힘이 하나도 없네. 그래도 사무실을 열었으면 뭔가 희망이 보여야 하는데.. 애가 저런 상태니.. 참.”

“그럴 만도 하지. 전 남자 친구한테 배신당하고 정신없이 개업한 상태니.. 아무리 그래도 정신은 차려야 될 텐데.. 걱정이네.”

“우리라도 자주 연락해보고 챙겨보자. 정 아니다 싶으면 우리 회사 경력직 뽑을 때 와보라고 하려고. 그래도 자격증 있으면 좀 우대하는 분위기니까..”

“그래 지혜 니가 그래도 비슷한 일 하니까 좀 낫네.. 난 설계사무소는 어떤지 잘 몰라서.. 아무튼 이만 들어가자. 오늘 즐거웠어. 또 보자.”

사무실에 혼자 남겨진 민영은 창밖 넘어 도시를 바라본다. 딱히 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집에 들어가긴 싫었다. 집에 가면 기다리는 건 어머니의 한숨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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