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건물들은 모두 훌륭한 교재이다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건물들이 있습니다. 버스만 타고 다녀도 정말 많은 건물들을 볼 수 있는데요. 보통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보던 박스 모양의 그렇고 그런 건물들이지만, 건축가들에게는 참고할만한 사례이자 학습 대상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 건물이 아주 오래된 옛날 건물이 될 수도 있고 요새 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소위 집장사 건물이라고 불리는 싸구려 건물이 될 수도 있고, 유명 건축가가 디자인한 비싼 건물이 될 수도 있죠, 모두 각자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건축가에게는 모두 볼만한 건물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좀 더 많은 비용을 쓰고 디자인에 신경 쓴 건물들을 더 유심히 보긴 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다소 후진(?) 건물도 흥미를 끌만한 요소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80~90년대에 지어진 옛날 건물들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정취가 있습니다. 옛날 상가나 목욕탕 같은 건물을 보면 벽돌이나 타일로 정성스럽게 마감한 것들이 많은데요. 창문 주변이나 층간 경계 부분에 마치 가구처럼 화려한 장식을 한 건물들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인건비가 훨씬 저렴했고, 작업하시는 분들이 좀 더 장인정신을 가지고 임하셨기 때문에 그런 시공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좀 더 모던하고 심플한 디자인을 선호하는 현재의 트렌드와는 조금 다르긴 한데요. 복고 스타일을 선호하는 건축가나 건축주들이 이런 스타일을 되살려서 외관과 인테리어에 적용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심지 한 구석에 남아있는 옛날 건물들은 나름의 멋이 있고 지나가면서 사진 한 장을 찍게 만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싸구려 집이라고 해서 볼만한 게 없는 건 아닙니다. 타산지석이라고, 이런 걸 조금 개선했다면 훨씬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예전에 다니던 설계사무소에는 가끔 쉬면서 커피 한잔 하던 계단참의 벤치가 있었는데, 창문 너머로 어디서나 볼 법한 건물이 있었습니다. 같이 일하던 고참 선배들과 그 건물을 안주삼아서 커피를 마시곤 했습니다. 아 저것만 고쳤다면 훨씬 나았을 텐데.. 저것만 좀 개선했어도 훨씬 나았을 텐데.. 하는 식의 대화를 했죠. 창문 위의 어울리지 않는 석재 마름모 장식, 층마다 허리띠를 돌린 듯한 석재 마감, 번쩍거리는 스테인레스 계단 난간 등이 그러한 비판의 대상이었죠. 그런 대화 속에서 저도 많이 배우고 성장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건축가들은 카페나 건물 로비, 호텔 같은 숙소를 들르더라도 작은 스케치북을 꺼내서 평면을 그려본다고 합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그 공간을 파악하고 스케치해봄으로서 설계한 의도를 분석해보고, 기록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저도 가는 건물마다 스케치해보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설계자의 의도를 파악해보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이를테면 계단으로 가는 동선은 왜 이렇게 처리했을까, 화장실은 왜 여기 설치했을까 하는 식으로 생각해보는 것이죠. 이런 생각들이 꽤 많은 공부가 됩니다. 특별히 좋은 건물을 방문하기 전에는 사전에 정보를 모아서 공부를 하고 가는 것이 좋습니다. 제일 좋은 것은 평면을 한번쯤 베껴서 그려보고 가는 것이죠. 이런 선행학습이 되어 있으면 그 건물을 방문했을 때 ‘이 도면이 실제 공간으로 이렇게 구현 되는구나’라는 식의 감이 오기 때문에 답사의 효과를 훨씬 더 높일 수 있습니다.
앞서 쓴 글에서 언급한 디테일 역시 건물을 보면서 놓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마음먹고 건물 안까지 살펴보지 않는 이상 건물을 보면서 가장 빠르게 접하는 것은 역시 외장재입니다. 석재가 어떤 식으로 골조에 붙는지, 금속 판넬이 어떤 식으로 시공되는지를 유심히 살펴 보곤 합니다. 건축가라고 해도 체험할 수 있는 프로젝트의 숫자는 제한적입니다. 모든 재료를 다루긴 힘들다는 이야기가 되겠죠. 그런 의미에서 다른 프로젝트를 통한 간접적인 학습은 어찌 보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도 지금까지는 벽돌로 된 건물들을 주로 다루어 왔는데요. 다른 재료에 대한 경험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입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주변의 건물들을 보면서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지 추측해보기도 하고, 기억해 두었다가 사무실에 들어와서 관련 자료를 인터넷으로 찾아보기도 합니다. 재료를 두들겨보면서 어떤 방식으로 시공했을지 짐작해보기도 하구요.
사실 옥상이나 계단 부분의 난간만 해도 굉장히 많은 재료와 시공법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스테인레스로 된 난간도 있고, 철재 평철이나 환봉에 도장을 한 난간도 있습니다. 유리로 된 난간도 있고, 나무로 된 난간도 있습니다. 이런 재료들을 가로로 길게 걸 수도 있고, 세로로 촘촘하게 심을 수도 있습니다. 계단이나 바닥에 수직으로 꽂을 수도 있고, 측면에 달아 맬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례들을 인터넷으로 찾을 수도 있지만, 직접 시공된 모습을 살펴 보는 것이 가장 큰 공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여러분들이 서울 시내를 다니시면서 쉽게 지나치실 수 있지만 놓치기 아까운 보석 같은 건물들을 몇 개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복잡한 서울 종로구를 지나다 보면 고고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빌딩 한 채가 있습니다. 김종성 건축가가 설계한 SK 본사 사옥입니다. 얼핏 보기에 주변 건물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어보이는, 그렇고 그런 네모난 건물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창호 주변의 섬세한 철골 디테일을 보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근대 건축의 3대 거장 중 하나로 칭송받는 미스 반 데 로에 에게 직접 사사받은 것으로 유명한 김종성 건축가는 미스의 엄정하고도 절제된 건축언어를 전수받아 구현해냈습니다. 그 중에서도 SK빌딩은 서울 광화문 시가지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어 일반인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건물입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한번쯤 찾아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소개해드리고 싶은 건물은 인사동에 있는 쌈지길입니다. 최문규 건축가가 설계한 작품인데요. 중정을 둘러싼 길이 마치 인사동 길이 연장된 것처럼 옥상까지 연결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사용자들은 이 건물을 접하면서 ‘건물’이 아닌 ‘길’로 인식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주변 환경에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죠. 1층 뿐만 아니라 상층부의 점포에도 접근이 용이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상업적인 측면에서도 대단히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벽돌, 목재, 노출 콘크리트 등의 외장재를 선택할 때도 주변 건물에 적용된 재료들을 면밀히 분석해서 가장 잘 어울리는 재료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또한 이 길은 중정을 조망하는 관람대 역할도 겸하기 때문에 공연이나 전시가 벌어질 경우 쌈지 ‘길’ 위를 관람객들이 빼곡하게 점유해버리는 진풍경이 벌어지는데요. 이 광경이야 말로 쌈지길의 진수를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 번째 건물은 대학로에 위치한 샘터 사옥(현 공공일호)입니다. 대학로를 상징하는 빨간 벽돌 건물의 대표 격이라고 생각하는 작품입니다. 공간 건축을 이끌었던 김수근 건축가는 벽돌을 이용해서 여러 개의 대표작들을 남겼는데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이 샘터사옥입니다. 제가 예전에 다녔던 정림건축이 대학로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요. 점심을 먹거나 차를 마시러 대학로에 갈 때면 자주 들러서 대 건축가의 기운(?)을 받곤 했습니다. 정연하게 배치된 창 주변을 섬세한 벽돌 디테일이 감싸고 있고, 그 위를 담쟁이 건물이 뒤덮고 있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 샘터사옥의 백미는 중앙으로 뚫려있는 필로티 공간인데요. 이 필로티 공간은 전면, 측면, 후면의 세 갈래로 입구가 뚫려 있고, 별도의 문이나 통제가 없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공간입니다. 여기에 천장재와 창호 하부에 사용된 짙은 색의 금속재, 바닥에 사용된 고전적인 둥근 패턴 사고석, 주변의 레벨차를 연결하는 계단과 램프 등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굉장히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누구나 올 수 있는 대학로의 휴식처로서, 비가 왔을 때 피하거나 약속시간에 누군가를 기다리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죠. 누군가 저에게 대학로의 중심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이 샘터사옥의 필로티 공간이라고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쉽게 가보실 만한 서울 시내 건물 세 가지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저도 갈 때마다 새로운 것을 느끼고 ‘더욱 열심히 해야 겠구나’라고 생각하게 해주는 훌륭한 건물들입니다. 여러분도 이 건물들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시고, 재료나 디테일 등을 유심히 살펴보신다면 방문하셨을 때 건축의 진수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