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협의와 협상으로 이루어진다.
이번 글은 저번 글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협의와 협상, 의사소통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저번 글이 상대방의 의견을 잘 들어주는 ‘경청’에 관한 것이었다면, 이번 글은 건축을 구성하는 여러 주체들 간의 의견을 조율하는 ‘협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선 건축이라는 것이 제한된 자원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건축주의 예산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크죠. 누구나 돈이 많다면 크고 멋진 집을 지을 수 있을 겁니다. 좋은 자재와 최신 공법을 써서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건축주들이 제한된 예산으로 최대한 가성비 높은 집을 지으려고 합니다. 시간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건축주의 상황에 따라 입주할 날짜가 정해져 있고, 그 안에 설계와 공사를 끝내야 합니다.
설계 단계에서부터 이러한 상황들이 최대한 고려되어야 합니다. 기간과 예산에 맞춘 설계가 그만큼 중요한 것인데요. 대부분의 건축주 분들은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해 많은 정보를 접하고 오시기 때문에 새 집에 대한 꿈에 부풀어 계신 경우가 많습니다. 예산을 고려했을 때 실현하기 힘든 규모와 수준을 이야기 하시는 경우가 많은데요. 건축가는 설계 단계에서부터 실현 가능한 수준을 정확히 제시해서 건축주를 이끌어가야 합니다. 이때부터 소위 ‘밀당’이 시작되는 것인데요. 때론 건축주의 욕망에 이끌려 그것이 모두 반영된 도면을 그렸다가 공사비가 예산을 훨씬 초과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이러면 그때서야 부랴부랴 설계에 반영된 여러 자재들을 하향 조정하거나 저가의 시공사를 써서 단가를 떨어뜨리기도 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규모를 줄여서 재설계를 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는 매우 소모적인 과정입니다. 이런 상황이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건축가는 예산에 맞는 설계를 해야 합니다.
사실 건축가가 아무리 전문가라고 해도 설계하는 건물에 어느 정도 공사비가 들어갈 것인지 정확히 가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합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평당 공사비’ 정도의 개념으로 어림하여 산정해보는 것이 현실인데요. ‘적산업체’라고 하는 회사들이 도면과 자재 사양을 보고 공사비를 정밀하게 산정해줍니다. 저희가 취급하는 영세한 수준의 공사들은 시공사에서 직접 공사비를 산정해주기도 하지만, 물량 산출 등에서 객관성이 떨어집니다. 제3자로 볼 수 있는 적산 업체에서 객관적인 내역서를 받아보는 것이 여러 모로 도움이 됩니다.
도면이 다 나오고 공사가 시작되면 현장에서의 협의가 시작됩니다. 본격적인 협상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건축가가 작성한 도서의 모든 부분이 시공으로 완전히 구현되기는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좋은 건물이나 선진 사례를 보고 수준 높은 디테일, 공법을 욕심내서 도면을 그리는 경우가 많은데, 시공사마다 수준이 천차만별이라 이것이 가능한 경우도 있지만, 힘든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장 상황은 도면과 다른 경우도 많습니다. 이웃집이나 지형 등의 상황이 대표적이죠. 이럴 땐 현장 상황에 맞춰 설계를 바꿔야 합니다. 건축가의 임기응변과 대처 능력이 중요하죠. 현장 상황과 시공사의 능력, 건축주의 의도와 예산 등을 고려해서 최적의 결정을 내려야만 합니다. 물론 모든 결정은 시공사, 건축주, 건축가가 함께 협의해서 이루어지지만 건축가가 중간 협상가 내지는 코디네이터로서의 역할을 할 때가 많기 때문에 건축가의 역할이 정말 중요합니다. 이렇게 현장에서 도면대로 시공되는지를 체크하고 협의, 감독하는 역할을 ‘감리’라고 합니다. 이 업무 역시 국가에서 공인된 면허를 가진 ‘건축사’가 하도록 되어 있는데요. 당연히 설계를 한 건축가가 도면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으니 감독을 하는 게 순리이겠습니다만, 국가에서는 공동주택 등 일부 용도 건물에 한하여 설계자가 감리를 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설계자가 감리까지 하면서 건축주 등과 담합하여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인데요. 법의 의도는 알겠습니다만, 감리를 해야만 설계자의 의도가 제대로 구현되는 현실을 생각해볼 때 건축가로서 아쉬운 측면이 많습니다.
공사는 대강 다음의 순서로 이루어집니다. 우선 땅에 규준 틀을 매서 건물을 앉힐 자리를 정확히 체크합니다. 필지에는 경계점이라는 게 있어서 다른 필지와의 경계를 알 수 있습니다. 측량이라는 과정을 통해 이것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이 잘못되면 건물이 엉뚱한 자리에 앉혀질 수 있으니 매우 중요한 과정입니다. 이후 건물이 들어설 자리에 터파기를 하고 기초 타설을 위한 거푸집을 짭니다. 건물의 뼈대가 되는 골조를 콘크리트로 하든 목조로 하든 기초는 콘크리트로 하기 때문에 여기까지는 거의 동일한 과정을 거칩니다.
기초를 타설한 이후에는 각 층의 골조가 올라갑니다. 철근 콘크리트의 경우 유로폼 등으로 거푸집을 만들어 1층씩 타설해 올라가고, 목조나 철골조는 부재를 조립해서 건물의 뼈대를 만들어갑니다. 골조가 완성되면 외장재를 붙입니다. 돌이나 벽돌, 스타코, 사이딩, 목재 등이 주로 쓰입니다. 지붕재는 기와나 칼라강판 등의 금속재가 많이 쓰입니다. 외장을 마치고 나면 창호를 붙이고 (창호를 먼저 붙이고 외장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후에 내부 공사에 들어갑니다. 벽면에는 석고보드를 붙이고 도배나 페인트 도장을 하는 경우가 많고, 바닥은 강화마루나 강마루, 장판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화장실 등의 타일 공사와 도기 공사 도 해야 합니다. 이런 건축공사와 더불어 배관, 보일러, 조명, 스위치 등의 부속 설비 공사들도 병행해서 진행해갑니다. 공사기간은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2층 정도의 주택이라면 4~5개월, 4~5층 정도의 다가구, 다세대 주택이라면 7~8개월 정도를 봐야 합니다. 여름엔 장마, 겨울엔 추위 등으로 실공사 일수가 줄어드는 경우가 많아 여유기간을 충분히 보는 게 좋구요. 특히 겨울공사는 각종 하자 때문에 피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 과정마다 건축가는 시공사, 건축주와 수시로 협의합니다. 골조의 철근 배근 상태도 매 층마다 확인해야 하구요. 건물이 생각과는 다르게 구현되어 현장에서 대응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사 기간동안 거의 매일 현장소장님과 통화하는 경우도 많고, 적어도 1~2주에 한번 씩은 현장을 방문해서 확인해야 합니다. 이런 협의를 자주 하면 할수록 건물 퀄리티는 올라가기 마련이기 때문에, 힘들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협상의 주체로서 건축가의 역할에 대해서 적어보았습니다. 건축가는 자신의 역량을 뽐내고 자랑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합리적으로 구현하는 실무자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과 소통하며 협업해야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율과 협의는 또 다른 측면에서 건축설계의 정수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