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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건축가 Apr 09. 2021

건축사사무소

건축소설 COMPETITION  #01

*건축사사무소: 공인된 건축사 자격증을 소지한 건축사가 개소한 사무실을 일컫는 말이다. 건축설계, 인허가, 감리 등 설계와 시공에 관련된 일련의 업무들을 처리하고 용역비를 받는 회사를 말한다.


마포구 상수동의 한 골목길. 홍대 주변의 번잡함을 조금은 뒤로 한 이면도로에 어디에서나 볼 법한 3층짜리 건물이 있다. 엘리베이터 옆에 별로 신경 쓰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작은 간판이 붙어있다.


‘OPEN PLAN ARCHITECTURE 건축사사무소’


사실 대한민국에는 수많은 건축사 사무소가 있다. 2만개라고도 하고, 3만개라고도 하는데 정확한 숫자는 건축사협회 회장 정도가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 많은 설계사무소들이 어디 다 숨어있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설계사무소들은 보통 이런 변두리에 자리 잡는 경우가 많다. 대로변이나 1~2층 같은 노른자 사무실을 차지하기엔 임대료가 너무 비싸다. 이면도로 주변, 지하나  3~4층이 고달픈 설계사무소들이 주로 자리 잡는 장소다.


3층으로 올라가보자. 어디에서나 볼 법한 민자 방화문에 아까 보았던 간판이 다시 붙어있다. 사실 두 개의 설계사무소 간판이 나란히 붙어있는데, 누가 보면 하나의 사무실인 줄 알 것이다. 가난한 건축가들이 하나의 사무실을 공유하여 사용하는 것인데, 역시 처음 시작하는, 패기는 넘치지만 가진 돈은 부족한 건축가들이 자기 사무실을 구하는 흔한 방법 중에 하나다.


끼-익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온다. 지금이 11시니 출근 치고는 꽤나 늦은 시간이다.


“야 정태호. 그래도 출근은 제 때 해야 되는 거 아냐. 아무리 일이 없다 그래도..”

“형, 왜 이래요. 나 일 있어요. 지난 주에 상담 온 것도 좀 봐야 되고..”

“뭐야, 너 그 인테리어 건 진짜 할거야? 완전 아파트 인테리어던데..

“일단 좀 보고요.”

“너 해외 경력 밖에 없어서 그런 일 쉽지 않을 텐데. 잘못하면 견적도 관리해야 되고. 니가 알아서 하는 거지만 생각 잘 해봐.”


사실 이 선배의 말 대로 정태호에게는 그런 경험이 전무하다. 10년 가까이 미국 생활을 해 온 그에게 한국 아파트 인테리어 설계란 그야말로 딴 세상 일이다. 아무리 미국에서 날고 긴 정태호지만 그런 일을 하라고 하면 자신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조카가 한국에 왔다고 작은 아버지 소개로 온 일인데 그냥 넘길 수도 없다.


‘하아.. 이런 일을 정말 해야 하나. 딱 봐도 아직 내가 할 만한 일이 아닌데.’


그렇다고 손에 딱히 잡히는 일도 없다. 미국에서 정말 손톱만큼 모아온 돈과 부모님에게 어찌어찌 빌린 돈으로 사무실까지 차렸지만 석 달째 딱 부러지게 하는 일이 없다. 매일 선배와 죽치고 앉아 소일하는 것이 아직까지의 상황이다. 선배는 작은 주택설계 하나라도 잡고 한다지만..


“태호야, 이번 달 월세 내야 돼. 경비랑 해서 문자로 보낼 테니까 시간 날 때 입금 해줘.”

“예.. 형 알았어요.”


벌써 월말이 되었나. 들어오는 돈은 없이 석 달째 돈만 나가고 있으니 슬슬 초조해진다. 패기 넘치게 만주벌판으로 나가는 광개토 대왕처럼 태평양을 건널 때 상상한 것은 이게 아니었는데.. 이제 정말 인터넷에 올라오는 현상설계들을 찾아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정태호의 이력은 누구보다도 화려하다. 우선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명문 사립 Y대 건축과를 졸업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설계를 했고, 매 학기 설계수업 학점은 A+가 당연한 것이었다. 설계 공모전에도 숱하게 이름을 올렸다. 그의 이름은 설계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전설에 가까웠고, 후배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교수들이 예뻐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런 그가 유학을 생각하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실 그의 집안은 그다지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무원 생활을 하신 아버지는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분이었다. 모아놓은 적금을 깨고 살고 있던 집을 팔아 어렵게 아들의 유학자금을 대셨다. 이제 태평양을 건너 도미(渡美)(미국으로 건너가는 것을 뜻하는 말)할 일만 남은 것 같았다.


어렵게 어렵게 공부해서 입학에 필요한 영어점수를 맞추고 작업실 구석에 처박혀 지금까지 해 왔던 작업들을 포트폴리오에 쑤셔 넣었다. 안 되는 영어를 해석해가며 수 차례 어플라이(유학 지원서)를 넣고 노심초사 결과를 기다린 지 몇 달째 되던 날, *MIT에서 합격소식이 왔다.


*MIT: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 미국 매사추세츠주(州) 동부 케임브리지에 있는 과학기술계의 사립 종합대학교. 이공계 방면으로 명성이 높은 명문대학교다.


이제 정말 내 실력을 펼칠 날이 오는구나. 부푼 꿈을 안고 비행기에 올라탄 정태호에게 미국생활은 정말 쉽지 않은 것이었다. 안 되는 영어, 동양인을 향한 알 수 없는 무시, 무시무시한 물가와 생활비, 이억 만리 타지에 혼자 있다는 외로움.. 그것들을 이겨내기 위해 정태호는 더더욱 설계에 매달렸다. 한국에서도 숱하게 밤을 샜지만 미국에서는 그 두 배, 세 배를 한 것 같았다. * 크리틱 때 말로 설명이 잘 안되니 3D 모델링 하나, 도면 한 장, 모형 하나라도 남들보다 더 만들어야 했다. 원래부터 아웃풋(결과물)을 뽑아내는 건 자신 있었던 정태호지만 그것을 극한까지 밀어붙여야 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빡센 날들을 보낸 결과, 정태호는 클래스에서 최우수 작품에도 여러 번 뽑히게 된다.


*크리틱: 건축설계 수업에서 한 학기에 2번 정도 학생과 교수들이 모여서 하는 품평회. 주로 학생들이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이에 대해 교수들이 비평, 평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정태호에게도 졸업의 날은 왔고 이제 취업을 생각해야 할 시기가 왔다. 원래부터 정태호가 미국 유학을 생각하고 해외로 나올 때부터 그의 목표는 하나였다. *미스, 꼬르뷔제 이후 세계 건축 담론을 주도하며 최고의 거장으로 자리 잡은 네덜란드 건축가 *렘 쿨하스. 그가 이끄는 건축사무소 OMA의 본사가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있다. 그리고 뉴욕을 비롯한 세계 여러 곳에 현지 사무실을 두고 있다. 세계 건축의 중심이자 트렌드를 선도하는 OMA만이 정태호가 경력을 쌓을 만한 유일한 사무소였다. 


* 미스 반 데 로에, 르 꼬르뷔제: 근대건축 최고의 거장으로 꼽히는 두 명의 건축가. 미스는 철골을 이용한 정연한 디테일과 모던한 공간으로, 르 꼬르뷔제는 ‘건축의 5원칙’을 기반으로 한 콘크리트 건물들로 유명하다. 


*렘쿨하스와 OMA: 도시와 건축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을 들고 등장하여 일세를 풍미한 건축가다. 이론에서 시작하여 다이어그램을 통해 실제화되는 건축으로 유명하다. 그의 사무소 OMA(Office for Metropolitan Architecture)는 1975년 개소한 이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건축사무소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누구보다도 화려한 포트폴리오를 선보인 정태호는 몇 차례의 인턴생활을 거쳐 뉴욕에 있는 OMA 입성에 성공한다. 각오는 했지만 OMA에서의 생활은 정말 쉽지 않았다. 끝없는 현상, 현상, 현상.. 그를 위한 끝없는 회의가 이어졌다. 렘 쿨하스는 아침에 회의하면 오후에 피드백을 원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 곳에는 정말 세계 모든 건축과에서 내노라 하는 최정예 에이스들만 모여 있었다. 자신의 *디자인 알트를 돋보이게 하고,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 그 모든 사람들이 경쟁하는 체제였다. 


*알트(ALT)는 대안(Alternaitve)를 뜻하는 영단어에서 나온 말로, 건축설계에서 최종안이 나오기 전에 스터디해보는 모든 대안들을 뜻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 흔히 설계 초기에 여러 팀원들이 각자의 알트를 만들어 오고 이를 논의하여 좋은 안을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정태호는 결국 OMA에서도 살아남았다. 수많은 현상설계를 거치면서 그는 에이스로 인정받았고, 그를 중심으로 하는 현상설계도 몇 차례 당선시킨다. 하지만 몇 년에 걸친 OMA 생활로 그의 심신은 지쳐갔고, ‘이제는 슬슬 한국으로 돌아가야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고민하던 정태호가 결정적으로 귀국을 결심하게 된 건 부모님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퇴직하시고 두 분이 적적하게 사시는 날들이 길어지자 외동아들이 돌아오길 바라시는 마음이 커졌다. 정태호의 나이가 서른이 넘어가자 은근히 장가가길 바라는 압력도 생겼다. 정태호 스스로도 OMA에서 언제까지 있어야 될지 고민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아무리 세계가 좁아지고 인종 차별이 없어졌다지만, 서양 회사에서 동양인이 높은 곳까지 오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정태호 스스로도 OMA는 경력을 쌓기 위해 온 것이지, 최종 기착지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사무실을 내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정리되자, 정태호는 10년여의 외국 생활을 접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기로 하였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아는 선배 사무실에 책상 하나, 컴퓨터 하나 들여놓고 일을 시작한지 석 달이 되었다. 오늘도 하릴 없이 책상에 앉아 지난 주에 나온 초등학교 체육관 현상설계 지침서를 들여다보고 있다. 사실 정태호는 미국에서 따가지고 온 미국 *건축사 밖에 없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국내 현상설계라도 국내 건축사와 협업이 필요하다. 


* 건축사: 건축설계를 하기 위한 공인 자격증. 건축사가 있는 사람만이 건축사사무소를 내고 공식적인 설계 활동을 할 수 있다. 건축물의 허가 과정이나 현상설계 참가를 위해서 건축사 자격증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도 건축사 자격증이 있는데, 다른 나라의 건축사 자격증이 있더라도 국내에서 건축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한국 건축사와 협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런 쬐그만 현상설계를 하려고 해도 누구와 같이 해야 되니.. 치사해서 한국 건축사를 따든지 해야지.. 누구랑 같이 하지.. 이 형은 자기 일 바빠서 못한다고 할텐데.. 아 모르겠다. 나가서 커피 한 잔만 먹고 오자.’


“형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사무실 근처 스타벅스에 와서 자리를 잡고 걸터앉아본다. 사실 나온다고 해서 딱히 일이 생기거나 생각이 떠오르는 건 아니지만, 나 같은 건축가라면 괜히 이런데 와서 있어야 영감이 떠오를 것 같다. 가방에서 *몰스킨 스케치북과 라미펜을 꺼내서 이것저것 적어본다.


* 몰스킨: 빈센트 반 고흐, 헤밍웨이, 파블로 피카소 등이 썼다고 알려진 유명 노트 브랜드. 이탈리아에 본사가 있다. 많은 건축가, 예술가들이 이 브랜드의 노트를 쓰고 있다.

* LAMY. 독일의 유명 만년필, 필기구 회사. 역시 많은 건축가들이 애용하고 있다. 특유의 필기감과 세련된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음.. 그 아파트 인테리어를 정말 해야하나.. 정수 형한테 물어 물어 해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아님 어떻게든 한국 건축사랑 조인해서 현상을 해야하나.. 암튼 뭐라도 하긴 해야 하는데..’


그 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린다. 이런 처지에선 어디에서 오는 전화든 반갑다. 일을 줄 것만 같기 때문이다. 태반이 광고 전화라 짜증날 때가 많지만.


어라. 대학교 교수님 전화다. 귀국했을 때 한번 뵙고 번호만 드렸지 따로 연락드린 적은 없는데 웬일이지?


“예 교수님 어쩐 일이세요? 잘 지내시죠?”

“그래 태호야. 너도 잘 지내지? 요새 좀 어때.. 일 좀 생겼어? 할만 해?”

“아뇨 뭐 별거 없어요..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그냥 저냥 하고 있어요.”


어느 정도 솔직하게 말해야 할지 고민스럽다. 그냥 제가 할 만한 일 좀 없을까요 대놓고 물어봐야 할까?


“그래 태호야. 요새 크게 안 바쁜가 보네. 그럼 나랑 현상 하나 하는 거 어때? 국립 현대미술관 신관 현상설계 나왔는데 한 번 해보고 싶어서. 니 능력이야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


국립 현대미술관 신관 현상설계. 그게 나왔다는 건 최근에 들었다. 국립 현대 미술관이 서울 한복판에 새롭게 신관을 낸다고 하여 현상설계가 나왔다. 미술관이야 언제나 건축가에게 최고의 로망 같은 프로젝트다. 그것도 교수님이랑 같이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예 교수님 저야 좋죠. 근데 언제부터 하시려구요?”

“사실 나도 내가 하는 사무실이 규모도 아주 크지 않고 여력도 많지 않아서. 너랑 우리 사무실에 있는 예린이. 예린이 알지? 그리고 똘똘한 직원 한 명 정도 붙여서 시작해보려고 하고 있어.”


아.. 최예린. 최예린이 거기 있었구나. 최예린이랑 엮여야 되는건가..


“음.. 그렇구나. 알겠습니다. 언제 한번 교수님 뵙고 얘길 해봐야겠네요.”

“제출이 한 석달 남았으니까.. 어제 공고 나왔거든. 내일이나 모레 학교에 내 연구실에 한번 와줘. 밥이라도 한 번 먹고 얘기 좀 해야지. *지침서도 나왔으니까 좀 보고.. 아 그리고 월급 줄테니까 그런 건 걱정 말고. 많이는 못주지만.. 하하”

“예 감사합니다 교수님. 내일 점심때.. 한 12시쯤 갈게요. 전화드릴께요”


* 지침서: 현상설계 공모전의 요강. 접수날짜, 제출물, 주의사항 등이 적혀 있는 문서다.


역시 박 교수님은 생각이 깊다. 민감해할 문제를 먼저 꺼내주시니 마음이 편하다.

그래도 당장 내일의 스케줄과 해야 할 일이 생기니 정태호은 뭔가 마음이 든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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