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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희 Oct 28. 2020

삶의 운전대를 잡았던 순간

헬스장 탈의실에서, 기미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어떤 회원이 말했다. “우리는 보통 얼굴 오른쪽에 기미가 생겨. 조수석에 많이 타니까.” 듣고 보니, 내 얼굴의 왼쪽 부분에 왜 항상 기미가 생기는지 알겠다. 오랫동안 운전을 했으니까.

얼마 전에 아들과 차를 타고 가면서, 내가 운전을 했다. 아들에게 말했다. “엄마의 운전 스타일 알지? 둘러 가도 큰길로 간다.” 똑같은 곳을 가는데도 아들이 운전할 때와 내가 운전할 때 다른 경로로 가게 된다. 그런데, 남편과 같이 차를 타게 되는 경우, 대개 남편이 운전을 한다. 남편은 내가 못 미더운지 좀처럼 나에게 운전대를 맡기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운전대를 잡지 않으면 같은 곳을 몇 번이나 가도 그 길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팔공산에 놀러 갈 때, 늘 남편이 운전대를 잡았기 때문에 나는 팔공산 지리를 잘 알지 못한다.

남편이 했던 지속적인 요구 중 하나는 내 통장에 약간의 잔액이 있다면 자신의 마이너스 통장에 넣어 달라는 것이었다. 내 돈을 내 통장에 넣어 둔다고 해서 이자가 얼마나 붙을 것인가, 반면에 내 돈을 자신의 마이너스 통장에 넣어 둔다면, 자신이 물어야 하는 이자를 조금이나마 아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 돈을 자신의 통장에 넣어 두고, 자신의 신용카드를 쓰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지극히 논리적인 말 같다. 그런데, 막상 내가 남편의 신용카드를 사용하게 되면, 남편은 카드 사용 내역을 검토하고 잔소리를 해 댄다.

남편과 나의 관심사는 공통된 부분도 있지만, 많은 부분 대립적이다. 우리는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다른 것을 원하고,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이런 대립은 당연한 것이며, 대화를 통해서 양 당사자가 원하는 것에 최대한 가깝게 가는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남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해 버린다. 남편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많은 경우 자신이 운전대를 잡고 있으니까.

결국 가족을 위해 돈을 쓰는데, 그 돈이 누구 통장에 있든 무슨 상관인가 할지 모른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여성의 통장에 돈이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의 작은 사회라고 할 수 있는 가정에서도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고 그 관점들이 서로 경쟁할 수 있어야 건강한 가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내가 자신만의 관점을 키우고 실현해 갈 수 있어야 장기적으로 가정에도 좋은 것이다. 그리고 가정 내에서 다양한 목적(방향), 방식, 태도 등이 형성되려면 여성에게 발언권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여성에게 돈이 있어서 자신의 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서도 아내인 내가 돈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브라질에서는 엄마가 가지고 있는 1달러가 자녀의 생존율을 높이는 효과 면에서 아빠의 수중에 있는 18달러와 같은 의미”라고 한다. “많은 나라들이 빈곤 완화 정책을 펴면서 보조금을 아빠가 아닌 엄마에게 전달하는 것도 바로 이런 연구 결과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콜맨, 2007).

내게 약간의 돈이 있어서, 내가 삶의 운전대를 잡았던 순간이 있는데, 그 순간들이 참 좋았다. 어느 학기에 강사료가 괜찮게 들어와서, 세 아이의 일본 여행 항공권을 끊었다. 남편 입장에서는 우리 형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난 그렇게 했고, 결과도 좋았다. 그리고 꼭 해 보고 싶었던 운동 개인지도(PT)를 받았다. 남편과 상의하지 않고 했던 것은 미안하지만, 만약 남편과 상의했다면, 운동을 왜 돈을 주고 하느냐고, 돈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수천 가지의 운동법이 있는데 왜 쓸데없이 돈을 쓰느냐고 타박을 들었을 것이고 나는 아마 운동을 포기했을 것이다. 내게는 내게 맞는 나름의 방식이 있는 것이다. 남편의 눈에는 바보 같고 비합리적으로 보이겠지만, 내게는 그 방식이 최선인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삶의 운전대를 잡아야 하겠고, 내 통장에 돈이 있어야겠다. 남편이 나더러 경제관념이 없다고 핀잔을 주겠지만.     



<참고문헌>

조슈아 콜맨 (2007). 게으른 남편(오혜경 역. 원저 The Lazy Husband by Joshua Coleman, 2005).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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