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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군 Jun 18. 2020

사업이 아니라 장사를 할 뿐이었다.


사업인 줄 알았다.

마케팅 전문가로 한 회사에 합류 제안을 받고, 현 사업모델이 답보상태에 있는 기업에서 신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연간 100억대의 매출고를 만들고 있었고, 수십 명의 임직원이 바쁘게 모니터를 쳐다보며 일을 하고 있었던 첫인상에 일단 뭐라도 결과물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다.

전자상거래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기업이지만 B2B 모델에 치중된 수익모델을 B2C로 확장하고 브랜드 가치를 올릴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목표였고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한 시점에 내가 합류한 상황이었는데, 이미 내부적으로 일부 직원이 마케팅에 대한 교육을 별도로 받아보거나 하는 작은 시도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프로젝트에 앞서 제대로 된 진단을 진행하기 위해 전체적인 정보 수집에 나섰다.

"현재 회사 트래픽이 얼마나 되나요?"

- 글쎄요. 한번 체크해볼게요. 

"현재 MAU와 DAU 상황이 궁금합니다. 

- 아직까지 따로 측정한 적이 없습니다.

대충 이런 류의 대화들이 오가면서 가까스로 구글 애널리틱스를 설치해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자세한 정보를 확인하려 했지만, 방문자 정보 외 대부분의 데이터가 수집되지 않고 있었다.

확인해보니 오래된 태그가 수년 전 설치된 이후 지금까지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언가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데이터를 축적시키며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영업과 마케팅 그리고 광고

한 달 정도 사태 파악과 기본적인 광고 세팅을 진행하고 나니 이제야 내부가 천천히 보이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임직원은 영업에 매진하고 있었으며, 마케팅이나 광고나 브랜드 같은 분야 담당자는 내가 처음이란다. 

당장의 매출 부서가 중요하다는 점은 전자상거래, 유통기업이 가진 특성이라 생각하고 잠시 고민을 미뤄둔 채 광고를 기반으로 한 데이터 수집과 웹 분석도구의 정상화에 집중했으나, 임원 면담을 통해 내가 생각한 모든 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우리는 영업이 가장 중요합니다."

"광고나 마케팅은 영업 마인드로 해야 해요"

"영업 부서가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마케팅의 존재 의의는 타깃 고객에게 제품을 전파하고 인지시키며, 구매 가능성이 높은 고객들을 찾아내어 효과적으로 전환이 발생하도록 유도하는 것에 있다. 단순히 영업팀에게 고객을 인계시키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B2B 영업부서와 별개로 내가 합류한 목적 중 하나는 B2C 모델의 강화인데, 영업팀의 뒤를 봐주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조직에서 나온 지금까지도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당시에는 최선을 다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동분서주했던 기억이 난다.



착각의 결과

한 가지 착각의 예시.

꽤 오래된 사이트임에도, 방문자가 상당히 쌓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환율은 개선되지 않았으며 결국 단순 마케팅 측면에서 벗어나 서비스 운영 전체에 대한 리뷰와 해결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 기업에는 운영 전문가가 1명도 없는 상태였고 내 입장에서 전반적인 운영까지 개입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었으나, 타깃 고객에게 아무리 마케팅 메시지를 전달하더라도 유입고객의 전환이 발생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해결책을 어떻게든 찾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당장의 직면한 문제인 회원가입 전환을 개선했는데, 기존 가입 프로세스는 2단계로 나뉘어 있었으며, 무려 17가지의 정보 입력창이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전환율이 낮을 수밖에.

소셜 로그인 등의 좀 더 트렌디한 기능은 나중에 고민한다고 치더라도 가입절차의 간소화는 매우 시급했으나 내부 개발진의 반대로 인해 일정이 멈추는 사태가 벌어졌다. 모두 고객에게 결국 요구해야 하는 정보라서 가입할 때 받아햐 한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이 문제를 내부적으로 설득하고 변경하는 데까지 수개월이 소요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간편 가입이 도입되고, 전환 수는 기존 대비 500배로 증가했다.

안타까운 건 이 부분에 대해서 내부적으로 충분한 공유와 공감이 이루어지지 않고 반쯤은 억지로 추진했다는 점인데, 이게 결국 최악의 결과 중 하나로 돌아온다.




무조건 내가 잘해서.

결과적으로 회사는 B2C 사업모델에서 매우 유의미한 매출 성장을 이루었다.

단순히 내 능력만이 아니라 소수의 공감대 형성이 가능한 임직원의 도움과 예상보다 시장 경쟁이 심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상보다 비교적 빠른 성과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다만 지난 시간 동안 내부에서 그 누구도 마케팅이나 브랜드 등의 관점으로 문제를 접근한 적이 없었던 조직이다 보니 결과물에 대해서 내부의 운영 시스템에 대한 리뷰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기에서 마케팅의 성과로 인정하는 순간 모든 실적의 이면에는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경영진이 반영될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마케팅에 대한 모든 메시지는 암묵적으로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되는 분위기 속에서 매출의 상승 원인은 경영진의 뛰어난 혜안과 시장 규모의 성장에 힘입어 회사가 성장했다는 내부 결론으로 끝나버렸다. 

재미있는 건 이 과정에서 사내 모든 실무진의 연봉 동결로 정리되었다는 점이다.






사업과 장사

이 기업은 내가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전, 수행 과정, 수행 이후에도 단 한 번의 사업을 한 적이 없었다. 오로지 원가와 판매 가격에만 집중했고 몇 개를 출고해낼 수 있는지만이 중요했다. 회원 수가 몇 명 인지도 관심 가지지 않았으며 하루에 몇 명이 유입되어 몇 명이 구매 버튼을 누르는지도 관심이 없었다. 

보고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게 썼다고 분노했으며, 설명이 상세하게 들어간 문서는 자신을 무시한다고 분노했다. 사내 교육 자료를 배포했을 때에도 경영진의 그 누구도 해당 자료를 열람하지 않았다.


사업과 장사의 차이는 간단하다. 

지속 가능한 모델을 개발하고 꾸준한 성장 동력을 위한 흐름을 만들어간다면 나는 충분히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업 안에서 필요한 수많은 요건과 진행과정에서 만나는 다양한 풍랑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장사는 오로지 내가 싸게 구해서 내가 비싸게 파는 것에 집중한다.

당장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과 내 주머니에 들어올 돈이 중요하다.

미래를 위한 준비보다는 당장의 돈이 어디에 있는지에 집중하고 풍랑을 만나더라도 언제나 뒤늦게 문제를 또다시 돈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사업의 묘미는 기업과 고객의 접점에서 세상에 더 나은 무언가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사는 이런 희열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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