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TV를 잘 안보는 탓에 저자인 유현준 교수가 유명한 사람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러던 중 쉬는 날에 듣던 유튜브 경제채널에 저자가 출연했던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서울은 살기 좋은 도시인가? 라는 주제에 저자는 꽤나 비판적이었습니다. 서울은 홈리스들이 점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도시 곳곳에 벤치의 수를 줄였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이동 도중 자유롭게 쉴 수 있는 공간의 수가 줄어들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다 보면 사람 간의 만남을 위한 장소는 돈을 내고 들어가는 카페나 술집 같은 곳들 뿐입니다.
한국인의 가장 흔한 주거형태인 아파트 단지는 블록별로 구획이 정해진 탓에 다른 환경에 살고 있거나,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섞이는 것을 막는 장벽이 됩니다. 또한 아파트는 구조가 3~4인 가구, 전용면적 85㎡를 기준으로 방 3개와 가족이 모일 수 있는 넓은 거실로 획일화된 탓에 공간이 효율적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지요. 특히 1인가구가 늘어나고 있는 요즘엔 더욱 전통적인 아파트의 구조는 활용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작가는 영상에서 이야기합니다.
개인적으로 남들과는 조금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제가 평소에 느꼈던 서울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도시들이 주는 미묘한 삭막감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얻지 못했을 때, 당시 방송에서 저자의 이야기는 공감되는 면이 많았습니다.
20세기 초반, 급격한 교외화 현상으로 인해 미국의 도시 외곽엔 우리가 TV에서 주로 봤던 똑같은 구조의 2층 목조 단독주택이 대량 양산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지역들은 대체로 비슷한 자산과 소득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교외 도시들끼리 계층화가 이루어지고 점점 폐쇄적인 문화가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지요. 같은 교외에 사는 사람 간에는 암묵적인 삶의 방식들이 정해져 있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이 지역에 살면 그릇은 이 정도는 써야지’ 식으로 말이지요. 심지어 인종분리가 당연하게 여겨졌던 1930년대에는 주택을 지을 때나, 거래할 때 유색인종에게는 팔지 않는다는 계약서까지 작성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1, 2기 대규모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비슷한 자산과 소득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도시들 간에는 상급지, 하급지로 나뉘어 서열이 매겨 지기도 하며, 이른바 ‘맘까페’로 대표되는 지역민들만의 폐쇄적인 문화가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신도시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심지에도 ‘아파트 단지’로 구역화 되어, 도시 곳곳에도 소규모 ‘도시섬’들이 존재합니다. 이런 점들은 다양한 분야, 계층 간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야 창조력이 발휘된다는 도시의 특성을 저하시키는 면입니다. 사는 지역에 따라 계층간 분열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계층의 고착화가 심화될수록 그 동안 우리나라의 고속 성장의 에너지원이었던 '역동성'은 점점 저하될 것입니다.
서론이 길었는데, 아무튼 도시를 바라보는 저자의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는 부분이 많아서, 결국 이 『공간이 만든 공간』을 찾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건축 발전의 흐름과 미래 건축에 대한 예측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살펴볼 수 있는 책입니다. 과목명으로 치면 ‘건축사 개론’ 정도로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는 건축이란 그 시대의 지혜와 집단의 의지가 합쳐져서 만들어낸 문화의 상징이자 결정체로, 그 시대와 사회를 대변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따라서 이 책은 건축의 발전과 더불어 인류 문명의 발전 과정도 짚어가면서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단, 작가는 문화라는 것은 복잡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물리 공식처럼 깔끔하고 명확하게 설명될 것이라는 기대에 대해선 경계합니다.
새로운 생각의 원천은 '융합'이라고 작가는 말합니다. 서로 다른 기후 형태에 따라 동, 서양의 농사법은 각각 벼농사와 밀 농사 위주로 다르게 발전하게 됩니다. 기후는 건축에도 영향을 미쳐, 동양은 기둥 중심, 서양은 벽 중심의 건축 기법을 채택하게 되지요. '삼각돛'의 발명이 촉발한 대항해시대는 동양과 서양의 거리를 더욱 단축시켜주는 '공간의 압축'을 만들어 내었고, 이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와 같은 위대한 건축가들을 통해 동, 서양의 건축 양식이 융합되어 발전하게 됩니다. '1세대 이종 교배'라 할 수 있는 동, 서양 건축의 융합이 어느정도 완성 단계에 이르자, 루이스 칸(Louis Kahn)과 안도 다다오(安藤忠雄)는 각각 유대 전통 양식과 일본 전통 양식을 혼합한 '시간을 뛰어넘는 융합'인 '2세대 이종 교배'를 선 보이게 되지요. 작가는 향후 건축계에서 어떠한 방식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건축 패러다임이 등장할 지 흥미롭게 지켜보기를 권하며 이 책은 마무리 됩니다.
이 책에서 문명의 발전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작가는 철학, 종교, 과학의 분야를 폭넓게 넘나듭니다. 서두에서 작가 스스로가 한남대교 같은 직선다리 보다는 좌, 우로 짚어가며 건너는 징검다리에 더 가깝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방대한 분야를 다루면서도, 작가는 매우 쉽고 간결한 문체로 전달합니다. 딱히 관련분야에 지식이 없더라도 독자는 손 쉽게 흐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학문의 특성상 글 만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을 위해 사진 자료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글의 설명을 보충하는 사진들을 공들여서 고른 티가 많이 납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설명을 위해 작가 전공이 아닌 부분까지 짚고 넘어가기 때문에 때로는 엄밀하게 따져보면 분명 논리적인 비약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점을 충분히 감안하고 읽을 것을 권장하며, 더 깊게 이해하고 싶은 독자들은 관련 학문 분야에 대해서도 더 심도 있는 공부를 하는 것도 좋은 책 읽기 과정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