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면서 노력보다는 운이라는 운칠기삼(運七技三) 말이 있다. 돌이켜보면 나의 삶 많은 부분에 운이 많이 작용했다는 걸 삶의 순간순간 마다 느끼고 있다. 어릴 때 바닷물에 3번 정도 빠져 생사의 기로를 왔다 갔다 한적 있었고 , 6살에 학교 들어갔지만 어떻게 고등학교까지 제대로 마쳤고 , 아빠를 통해 비리만 안저지르면 잘리지 않는다는 공무원이 어쩌다 되었고, 하루에서 수십 번 독신으로 살까 , 그냥 결혼할까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하다 30대 중반 막차를 타듯 결혼이라는 제도권에 것도 올라탔었다.
공무원이 되야겠다고 의지를 불태운 적도 없었다. 80년대 후반 그 시절에도 할게 공무원밖에 없는 거 같아서 어쩌다 공무원 시험 접수하기 위해 간 곳에서 여고동창을 만났다. 결국 둘 다 나중에 시원하게 미끄러졌다. 친구는 웨딩 이벤트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고 난 고향사람이 사장으로 있는 전화기 회사에 작은아버지 소개로 잠시 해외영업부에서 일했으나 주로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눈치 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렇다고 당장 나갈 수도 없고 그래서 그 당시 나의 미래 노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안정된 직장을 가지면 좋겠다 해서 노트에 몇 년 후 공무원을 희망사항으로 적어두었다. 그러다 자연스레 회사가 부도날 즈음 공무원 자리가 있다며 내려오라고 시골에 계신 아빠한테서 연락이 왔다.
그 당시 복지에 대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지만 인력이 부족해서 사회복지인력 양성과정을 통해 자격증을 주고 별정 7급 공무원으로 채용하는 것이었다. 국립 사회복지연수원에서 몇 개월간의 교육을 받고 91년 12월 난 그렇게 난 얼떨결에 공무원이 되어버렸다. 젊은이들은 중학교 졸업 후 서울로 도시로 향할 때 난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내 뜨거운 청춘을 내 고향 섬에서 저당 잡히게 되었다.
업무도 서툴기도 했지만 별정7급으로 채용되었기에 동료 공무원들의 질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그만두고 어디 가서 새로 시작할 능력도 용기도 없었기에 그 당시 그 선택은 최선이었던 것이다. 지금 여기서 그만두면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는 거 같아서 그냥 시간이 가길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동료 직원들의 교묘한 괴롭힘은 그만두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거기서 그만두면 내가 지는거 같았다. 성인지 감수성도 전혀 거론되지 않던 시대라 기상천외한 일도 많았다. 자리에 앉아있으면 와서 뒤 속옷끈을 잡아당기거나 앉으려고 하면 의자를 빼버리며 골탕 먹이는 수법인데 그게 그들에게 친근감의 표현인 줄 알고 있는 거 같았다. 그 행위를 한 자는 동네 백수로 수년간 살았을 때도 거의 다방에서 여자들과 하루 종일 노닥거리고 있는 걸 본 적이 있어서 그 습성이 남아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 당시 난 바보같이 아무런 항의도 하지 못했다. 어릴때부터 내가 알던 사람도 있지만 내부적 분위기도 그저 그래서 얼른 시간이 지나 그곳을 탈출하는 것만이 내가 살길이었다.
매년 9월이면 영세민 책정이 정기적으로 있어서 영세민 연명부를 작성하기 위해 한 일주일 정도 다른 면사무소 근무하는 동료들과 여관에서 작업을 해야 해서 오해도 받는 사람도 있었다. 면서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겨울철 산불근무를 주말마다 시작했고 인근 산에 불이 나면 등짐펌프를 지고 산에 가서 불을 꺼야 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때 인근면에 큰 산불이 났는데 서울 연수원에서 같이 수료한 동료가 불어오는 방향에서 산불 끄다가 순직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시절에는 복지직관련 사건사고 뉴스도 많았다. 20대 내 또래 복지직 공무원이 업무량 과다로 스트레스받았는지 캐비닛에 있는 문서를 몰래 소각을 한 사건이 뉴스에 사건으로 나온 적 있었다. 자기 것만 소각하면 오해받을까 봐 동료 것까지 같이 소각했다고 한다. 마치 그 동료가 나인 거 같은 두려움도 들었고 사무실 직원들도 나도 그러지 않을까 하는 눈빛을 보내는 거 같았다. 실제로 인근면에 근무하는 동료도 숙직하면서 2층에서 문서를 창밖으로 날려 감사계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과거는 언제나 후회인지라 어떻게 하면 그 후회를 줄이며 살 수 있을까 고민하지만 쉽지 않다. 그땐 세월의 풍파를 겪지 않았던 아무것도 모르던 20대인지라 영세민 책정해 달라고 와서 상담하면 부양의무자 기준에 맞지 않는 경우 너무도 매몰차게 안된다는 말을 했고, 담당자를 통해 해결되지 않으면 면장한테 말해서 책정되게끔 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어차피 내가 애써 그럴 필요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어설펐는지 모르겠다. 뭔 배짱으로 면장이 해달라는 사람도 안해준 적도 있었다. 그런 저런 사건으로 면장에게 찍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내면에 아웃사이더 기질은 그때부터 굳은 심지로 자리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굳이 끼워주지 않겠다면 굳이 끼지 않고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 영원히 난 거기서 근무 안 할 테고 시간은 가고 모든 건 변할 것이다. 그들이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여기서 물러날수 없다. 그들이 원하는데로 그만둬준다면 그들은 쾌재를 부를것이다. 그들의 괴롭힘은 나를 더욱 강하게 했고 더욱 그만두지 않게 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것을 그만두고 어디 나가 새롭게 뭔가를 시작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이 친밀하게 잘해주었더라면 또다른 공허함이 밀려와 서울생활을 동경하며 시골공무원이고 뭣이고 내 청춘을 여기서 썩히지 않고 도시에서 불태우겠다 하고 서울행을 택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