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다
" 일이 선한 것이라는 차원을 넘어 일하지 않는 것이 아주 나쁜 것이라는 폭넓은 공감대가 존재하는 듯하다. 특별히 즐기지도 않는 일을 원하는 수준보다 더 열심히 노예처럼 일하지 않는 누군가는 나쁜 사람, 식객, 게으름뱅이, 동정이나 공공구호를 받을 자격이 없는 한심한 기생충이라는 것이다"..... 어쩌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됐는지는 몰라도, 바쁘고 스트레스와 격무에 시달리는 듯해야 봉급을 받을 자격이 있고, 일을 충분히 즐기면서 돈을 받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고 있다. 자신의 존엄성과 가치를 일로 정의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직업을 싫어하는 묘한 상황에 갇힌 사람도 많다. 그래버는 이를 "오늘날의 일의 역설"이라고 부르지만, 청교도적 관점에서 역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일을 인격 형성의 도구로 본다면, 일을 싫어할수록 바람직한 것이다분주함, 스트레스, 과로는 자기를 불살라 올려드리는 현대판 희생 제사가 되어버렸다. 44p.
<이토록 멋진 휴식> 존 피치, 맥스 프렌젤
휴직 중이어도 직장 다닐 때와 마찬가지로 늘 아침 6시 정도에는 일어난다. 아침 준비를 마치고 식구들이 나간 후 오전 8시 반이면 나만의 하루가 시작된다. 온라인으로 듣고 있는 토익 강의는 왜 이렇게 긴지 , 강의를 1.5배속으로 해놓고 듣고 있지만 필기까지 해야 하니 힘이 든다. 펜은 만년필밖에 사용 안 하기에 필기할 땐 색색의 만년필 잉크를 이용한다. 각각의 만년필엔 각각의 잉크가 담겨있다. 뚜껑을 오래 열어둘 수는 없어서 검은색을 쓴 후 얼른 닫고, 붉은색을 열어 쓰고 얼른 닫고 , 또 핑크색을 집어 들고 밑줄귿고 닫고 상당히 분주하다. 8월 중순까지는 끝내야 하는데 괜히 시작했나 하는 후회도 하고 있다. 이것 외에 온라인으로 전에 주문한 종이책도 있는데 활자가 너무 작은 거 같아 활자가 큰 책으로 큰 다른 책으로 주문할까 하다가 공부도 열심히 안 할 거면서 책만 사 쟁기는 거 같아 그만두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아이들과 어떤 메뉴를 포장해 와서 먹을지 고민한다. 갈수록 입맛이 고급화되고 까다로워지는 거 같아 식비도 늘고 있다. 얼른 8월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다. 점심을 먹고 조금 쉬었다가 오후 세시쯤 되면 고온의 게르마늄 원석으로 몸을 달구는 곳으로 가려고 주섬주섬 준비를 한다. 집에서 차로 5분 거리다. 바로 그 앞에는 헬스장이 있고 사우나도 있고 얼마 전에는 1층에 마사지 샵도 있었다. 헬스장도 이젠 12시부터 영업을 한다. 전에는 헬스장을 먼저 갔다가 파동 욕장을 간 후 사우나를 끝으로 집으로 갔었다. 하지만 오전에 분주함으로 피곤했는지 헬스장 가면 자전거 돌리다 꾸벅꾸벅 졸게 되는 경우가 있다. 차라리 온몸의 피로를 먼저 풀고 개운한 몸으로 운동을 하면 더 가벼운 몸으로 잘 될 거 같아서 루트를 바꾸었다. 그랬더니 바로 운동의 활력이 생겼다. 고온의 게르마늄으로 몸을 데우는 것부터 시작했더니 몸이 한층 개운해진다. 습관이 돼서 이젠 하루라도 운동이나 게르마늄 고온의 원석에서 땀을 빼는 걸 거르면 몸이 찌뿌둥하다. 사우나까지 마친 후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 러닝머신을 한 시간 하고 자전거를 30분에서 한 시간 타면 하루의 운동은 끝이다. 무리하지 않고 꾸준히 운동을 하는데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이곳은 원래 산이 있는 쪽에 만들어진 실버타운 근처라 창밖으로 커다란 나무와 펜션들이 이국적 풍경을 자아낸다. 마치 산속에 지어진 외국의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잎사귀가 작고 풍성한 커다란 나무는 가벼운 바람에도 심하게 흔들린다. 지금 밖은 바람이 불고 있구나 느낄 수 있다. 조만간 가을이 온다면 창문을 열어두고 저 바람 냄새를 맡을 수 있을 텐데. 비라도 온다면 전면 창문을 통해 비 내리는 풍경을 보며 운동을 할 수 있다. 올해 겨울의 눈내리는 풍경이 무지 기대된다.
그렇게 하다 보니 직장인들의 퇴근시간인 6시가 다가온다. 일을 안 해도 운동과 개인일로 하루가 빨리 지나간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저녁에는 가족들과저녁식사를 끝낸 후 그동안 이어온 독서를 한다. 독서를 하고 예전처럼 중요한 부분은 만년필로 노트에 필사도 하고 독서 서평단 신청해서 신간도 읽고 블로그에 올리는 일도 꾸준히 하고 있다.
직장에 나가지 않아도 심심하거나 불안하거나 외롭지 않다. 연말까지 휴직이지만 내년이 오면 또 연장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이런 느낌은 정말 직장 다니면서 결코 느껴본 적이 없는 완전한 다른 세상 이다. 일 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고 개인적인 건강을 위해 애쓰고 , 살림을 하고 독서를 하고 이 모든 시간들이 너무도 만족스럽다. 반면 내가 이렇게 개인적인 자유와 여유를 누리지만 과거 좁은 사무실에 갇혀 하루를 저당 잡히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감정 소모했던 시간들이 잡념으로 다가오는 건 어쩔 수 없다. 과거의 기억을 지우는 장치가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다. 이 자유시간은 연말까지고 내년이면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 되돌아간 일터에서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지 기대 반 두려움 밤이다. 너무 애쓰며 살진 않겠지만 그저 그렇게도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