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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ce Oct 09. 2022

필사의 맛

필사를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한 5년은 된 거 같다. 필사를 시작하게 된 것은 단지 만년필을 자주 사용해야 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필사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어보지 않고 처음부터 단순히 책을 필사하는 것은 정말 지루해 보였다. 내가 필사하는 것은 책 전체를 필사하는 것이 아닌 책을 읽어보고 중요한 부분만 하는 것이기에 더 집중도가 높았다.


나중에 그 책에 대해 생각해볼 때 중요한 부분을 보기 위해 다시 그 책을 펼치게 되는 것보다 책을 기록한 다이어리를 보는 게 더 좋은 방법 같았다.


문장을 적고 밑에 내 생각을 기록하기 위해 여백을 남겨두고 필사했지만 쓰는데만 급급해서 여백에 내 생각을 적는 일은 소홀히 한 건 사실이다. 다시 그 여백을 메꾸기 위해선 철 지난 다이어리를 다 꺼내놓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그 작업을 해야 한다.


또 가장 큰 문제는 한 다이어리를 다 쓸 때까지 여러 권의 책을 필사를 했는데도 책 제목 분류를 전혀 해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책을 읽고 어떤 문장을 썼는지 찾으려면 다이어리 사용한 것 전체를 뒤져야 할 판이다.


앞으로 내가 해야 할 것은 책 내용을 적어두고 다이어리 앞에 목차를 적어두는 것이다. 그러면 더 쉽게 내가 부분 필사한 책을 찾기도 쉽고 기억하고 싶은 문장을 더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사를 이렇게 오랫동안 할 수 있었던 데는 손맛에 있었다. 잉크를 충전한 만년필이 약간 눈에 좋은 질의 노트 위를 미끄러지듯 선명하게 써지는 느낌의 절반은 손맛에 있다고 봐야 한다. 또 만년필의 영향도 크지만 만년필 못지않게 다이어리의 질 또한 중요하다. 계속 바라봐도 눈이 부시지 않는 아이보리색의 노트가 좋을 듯싶다. 노트와 펜의 궁합 또한 중요해서 어떤 노트에는 어떤 펜이 잘 써진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무슨 내용을 적더라도 적으면서 부드럽게 써진다거나 착착 노트에 달라붙는다거나 그런 느낌이 있을 때 더 필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연필이나 샤프도 아주 진하고 부드럽게 써져야 밑줄 긋고 공부하고 싶어지는 것과 같다.


그렇게 만년필로 선명하게 필사된 노트를 바라보며 뒤적거리면 소소한 만족감이 밀려든다. 아쉬움은 중요한 부분은 또 다른 색의 잉크로 충전한 만년필을 사용해 구분을 지어야 하는데 한 가지 만년필을 들고 필사를 시작하면 좀처럼 만년필을 바꿔서 쓰기 귀찮은 점도 있다. 정말 부지런한 사람은 여러 색깔로 구분 지으며 필사를 하기도 한다.


나중에 한 권의 책을 다 부분 필사를 한 다음에 다른 색의 만년필을 쓰지 못했다면 색연필로 그 위에 색을 칠하면서 꾸밀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들은 언제나 늘 새로울 뿐이다.


이제 퇴직 후에 어떤 취미를 가지고 살 것인가를 슬슬 고민해 볼 시기가 되었지만 딱히 남들 다하는 보편적인 취미활동중에서 내가 할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단지 이렇게 필사하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지만 영어뉴스 흘려듣기 하고, 산책하고 미술관 관람하고 커피 마시고 공연 보면서 깨알 같은 날들을 살아갈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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