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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ce Oct 12. 2022

커피머신 방랑기

십여 년 전 육아와 직장 사이를 힘들게 이어가던 내게 커피는 작은 위안이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테이크 아웃한 커피도 꿀맛이었다. 처음엔 그렇게 휴게소에서 마시는 커피도 맛있었는데 입맛이 고급화되면서 휴게소 커피처럼 밋밋하고 맛없는 커피가 없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이젠 일반 카페에서도 어디가 커피 맛집인지 아닌지 구분할 정도로 커피 입맛은 고급화되었다.


그 시절엔 캡슐커피도 널리 대중화되지 않을 때였다 우연히 이웃블로그를 보고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커피머신을 구입해야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20년 만원이 넘는 에센자라는 머신과 거품기인 에어로치노까지 구입하게 되었다. 남편의 모진 구박이 있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 후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자동적으로 커피 향을 느끼며 잠을 깨우고 하루를 시작했었다. 졸음으로 겨우 일어나는 아침에 우유 섞인 캡슐커피 한잔은 눈을 번쩍 뜨게 할 정도로 강렬했다. 그렇게 10여 년 이상을 에센자와 함께 했다. 휴일엔 하루에 4잔까지도 마시기도 했다. 이게 마시면 맛있고 그 중독물질은 뇌신경을 자극해 어딘가에 집중하게 했다. 운동을 하기 전에도 커피를 마시면 평소보다 덜 힘들게 할 수 있고 독서를 하기 전에도 커피를 마시면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그게 다 카페인 영향이긴 하지만 말이다.


에센자

​그 후​​ 커피에 대한 관심이 다양해지면서 이탈리아산 에스프레소 머신을 비롯해 그라인더도 구입했다. 커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 혹한 여러 가지 커피 도구 및 원두도 주야장천 구입했었다. 남들이 좋다는 것도 솔깃해서 구입했었다. 나중엔 에스프레소에 빠져 드롱기 머신도 구입했지만 아쉽게도 당근 마켓에 팔아버리고 아직도 후회하고 있다. 물건이라는 게 그냥 놔두면 언제 어떻게 또 써먹을지 모르니 창고 같은데라도 보관해둬야 한다는 걸 느낀다. 미니멀한다고 주구장창 버리는 게 능사가 아니다.


드롱기

어느 날부터 집에서 내려먹는 것도 귀찮아지기 시작해 카페 가서 커피를 자주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집에서 먹는 커피도 질리고 캡슐 사는 것도 질리기 시작해 머신 사용을 한 일 년 정도 안 하고 방치했었다.

이 사무실에 올해 초 이동해왔는데 젊은 직원들이 개인용 머신을 책상 옆에 가져와 캡슐커피를 먹고 있는 걸 봤다. 최근엔 캡슐커피가 일반화돼서 너도나도 한 개씩은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걸 보니 집에 있던 오래된 에센자가 생각났다. 그래서 먼지 묻은 에센자를 가져와서 사무실에서 가동해보니 이거 웬걸 작동이 안 되는 거다.


네스프레소 고객센터에 문의 결과 에센자 머신은 이제 나오지도 않고 수리 불가하며 보상 판매하고 있고 새재품 구매 시 20프로 할인해준다고 한다. ​내가 사고 싶었던 우유 거품기까지 같이 있는 것은 가격이 40만 원이 넘어가서 20% 해도 후들후들한 가격이었다. 그러다 인터넷 검색해보니 30% 할인된 가격에 그걸 파는 사이트를 발견했다. 왠지 속은 사람만 바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다시 네스프레소에 본사에 전화했다.

" 인터넷 사이트 가격이 보니 30프로 할인된 가격이던데 정말 제가 가지고 있는 거 보상받으면 20%만 되나요? 진짜 안된다고 하면 저는 그 사이트에서 사려고요.."

"고객님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다시 한번 확인해보겠습니다.."  몇 초 후 고객센터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 고객님은 전에 에센자를 10년 넘게 사용해서 30% 할인받을 수 있습니다. " 이거 웬걸 그 말을 듣고 기뻤지만 처음 전화 건 내용으로 구입했으면 어쩔뻔했나 싶었다. 소비자 입장에서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방법 다 해서 원하는 물건을 구매해야 할 것 같다. 내가 다른 사이트에서 산다고 하니 다급해져서 옆에 매니저한테 상의 후 그렇게 말했나 하는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30프로 할인된 가격으로 최신 라테 제조기를 샀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


우선 내가 사용한 머신을 수거해 간다고 한다. 수거는 이틀이 걸렸지만 일주일이 넘도록 머신은 도착하지 않았다. 처음에 머신 수거하고 입고까지 일주일 정도 걸린다는 말을 듣고는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열흘이 지났다. 다시 고객센터 전화해보니 문자 안 받았냐고 하길래 문자 한 통도 온 적 없다고 했다. 상담원은 머신이 바로 어제 입고되어서 주문 가능하다고 했고 찜했던 머신 결제까지 끝냈다. 오늘 발송하면 내일모레쯤 받아볼 수 있다고 했다.


드디어 모레가 되었는데도 머신 연락이 없다. 다시 고객센터에 전화했더니 전산마비로 오후에나 머신 입고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오후에 전화 주겠다고 했는데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문자가 떴다. 오후에 택배를 발송하는데 발송처가 네스프레소인 거다. 그리고 문자내역을 보니 네스프레소라는 회사는 내 번호에서 스팸 처리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쪽에서 온 문자를 내가 받을 수 없었다. 과거 주 고객인지라 자주 신상품이나 이벤트 문자가 와서 스팸 처리했던 것이다.


드디어 라티시마가 도착했다.



언박싱하는 것도 동영상으로 찍었다. 우유 넣어 직원들 한잔씩 돌리고 나니 그 기대했던 감정도 조금 사라지고 피곤함이 급 몰려왔다. 집에서도 아침에 라테가 필요하고 사무실에서도 라테가 필요한데 두대를 살 수 없고 어떻게 해야 할까. 팀원은 격주로 이동하면 어떠냐고 한다. 한주는 사무실, 한주는 집. 그보다는 매일 들고 출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 들고 사무실 온 순간 다시 들고 퇴근할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집에는 에어로치노가 있으니 에스프레소 머신을 하나 사고 이건 사무실에 놓아둘까 하는 생각을 하는 사이 커피맛이 예전에 느끼던 그 진하고 달콤한 맛이 아니었다. 그 순간 나는 진한 에스프레소 머신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다 전자동 커피머신 후기를 보게 되었다. 그걸로 바꾼 후 커피값이 줄었다는 둥 정말 만족하며 쓰고 있다고 한다. 또다시 전자동 커피머신을 검색하다 도저히 그건 아닌 거 같았다. 그래서 당근 마켓을 검색하니 2년 된 커피머신이 정가의 50프로 가격에 나온 게 있었다. 그것도 솔깃했다. 이렇게 라테 머신을 산지 며칠 안돼 또다시 에스프레소 머신 산다는 건 커피광이 아니고서야 그럴 순 없는 거 같았고 어디선가 남편의 한숨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당근 마켓에 2만 원에서 5만 원 하는 에스프레소 머신도 있었다. 그날 밤 폭풍 검색을 하고 팀원에게 말했더니 그건 아니라고 고맙게도 절대 못 사게 했다. 암튼 그렇게 며칠간의 짧은 정신적 방황을 했고 이제 그냥 지금 있는 라테 제조기 라티시마로만 만족하고 커피머신 방랑과 허영을 끝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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