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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ce May 03. 2023

맛있는 은갈치를 잃어버릴뻔했다.

타고난 부산함과 나이들어 겪는 건망증에 대한 고찰

노동절을 계기로 하루의 특별휴가를 얻게 되었다.  과거 노동절엔 쉬지도 못하고 일하거나 체육대회랍시고 체육관에서 팀별 배구게임하는 거 지켜보다 보내버린 것에 비하면 환경이 많이 나아졌다. 주중에 얻은 하루의 특별휴가는 오로지 나 혼자 보내는 것이라 절대 시간소모 없고 알차게 보내야 한다. 그날 무엇을 해야 보람차게 보낼지 전날 저녁부터 고심을 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뭘 할까 했지만 별다른 계획이 떠오르지 않았다.


평온한 하루였다. 햇살은 너무도 따사롭고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에 행복이 넘실대는 하루였다. 세탁기와 식세기를 돌린 후 거실에 둔 여분의 책상을 아이들 방으로 끌고 갔다. 사용하지 않는 그릇들은 싱크대 하부장에 따로 보관하고 기회 되면 굿윌스토어에 기부를  할 계획이다. 아이들이 쓰던 작은방에 공기청정기, 선풍기, 제습기를 넣어두니 거실이 훨씬 커진 느낌이다.


'이제 뭘 해야 할까'


하늘은 맑고 햇빛은 화사했고 간간히 바람이 불어와 앞동 앞에 심어진 초록의 나뭇잎사귀를 흔들었다. KBS클래식 음악을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 켰다. 캡슐커피를 이용해 커피를 추출하고 거기에 우유를 넣은 라테 한잔을 들고 소파에 앉아, 며칠 전 여동생이 추천한 히가시노게이고의 < 악의>를 펼쳐 들었다.


몇 페이지를 읽어 내려가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뭔가 찾아가라는 것이다. 마침 내가 쉬는 날 이걸 찾아오라고 하니 타이밍이 좋네 했다. 이렇게 인근 도시로 갈 일이 생겼다면 그 근처 경치가 좋고 넓고 커피맛이 좋은 카페를 가서 그곳에서 독서를 하면 좋지 않을까. 커피만 마시고 오기엔 조금 아까운 날이다. 최근 주변인들이 내 머리를 손질했으면 좋겠다는 말과 여동생이 '언니 머리 가발같이 보인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참에 미용실에도 다녀올까?'


긴 머리처럼 경제적인 건 없다. 그냥 길면 되니까. 하지만 그 긴머리조차도 제대로 관리 못하면 전설의 고향 주인공이 될수 있다. 단발머리는 계속 잘라줘야 하니 부지런해야 하고 돈도 조금 든다. 이젠 미용실에서 몇 시간 앉아서 마무리까지 기다리는 것도 부대껴 가는걸  미루는 중이었는데 오늘이 딱 좋은 날이다. 오전 11시로 예약을 했고 그곳 도착하니 10시 반 밖에 안되어 바로 옆 카페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당초 계획은 더 멋지고 경치가 좋은 카페에서 <악의>를 펼쳐 들고 커피를 마시는 것이었는데 내가 들어간 카페는 아주 작은 카페였다. 오전인지 손님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카페마다 시그니쳐 커피가 맛있는데 그곳은 그런 게 없었다. 아인슈페너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크림이 섞인 '아인슈페너 라테'를 주문하는 순간, 주문을 받은 주인인지 점원인지도 모르는 여자가 딱 알았다고 하며 매대 위를 손으로 탁 치는 듯한 모션을 했다. ' 저건 어떤 의미인가'

'내가 별로인 메뉴를 주문한 건가' . 아인슈페너 라테가 나왔다. 점원은 위에 크림은 떠먹으라고 한다. 하지만 크림을 몇 스푼 먹는 순간 속에서 느끼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휘저으니 크림인지 커피인지 모르게 커피맛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다. 더 먹기도 그렇고 절반이상 남은 걸 안 먹는다는 아까운 일이다. 음료를 남기고 나오는 건 내 사전엔 없다. 너무 달다는 평을 했다. 그래서 스푼으로 떠먹는 거라고 말하지만 '크림이 너무 달아서요'라며 말하며 그곳을 나왔다. 커피숍 이층은 가정집인지 웬 노인이 내려와 여자에게 뭘 먹으라고 주고갔다.

'건물주인가?'


11시가 되어 바로 옆 미장원으로 들어갔다. 한 명의 손님이 나감과 동시에 내가 들어갔다. 딱 한 명씩만 받나 하고 둘러보니 여자 2, 남자 2명의 관계자들이 있다. 누가 원장이고 누가 종업원일까. 손님은 딸랑 나 혼자였다. 나머지는 뭐하는 사람들인가. 인터넷으로 본 실내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내가 며칠 전 가려고 했던 그곳이 더 좋았는데 그쪽으로 갈걸 그랬나. 여긴 분위기가 조금 칙칙하다. 긴 머리를 싹둑 자르며 가오리펌을 하는 사이 아까 먹은 아인슈페너 라테가 너무 달았는지 슬슬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다행히 머리가 완성될 때까지 큰일은 없었다.  


미장원을 가서 헤어스타일을 바꿨으니 오늘 큰일 하나는 치룬셈이다. 이렇게 평온하고 화사한 특별휴가의 날 집으로 곧장 가기는 아쉬웠다. 점심을 안 먹어서 검색을 통해 20분 운전해 갔더니 매장에 전시된 샌드위치가 없고 즉석에서 만들어준다고 한다. 내키지 않았다. 후기가 좋다는 카페를 겨우 찾아갔지만 그 근처에 보이지 않았다. 로드뷰로 보니 바로 앞 건물인데 건물은 굳게 닫혀있고 아무것도 붙어있지 않았다. 폐업한 것이다.


결국 근처 또 다른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러 들어갔는데 동시에 어떤 자동차와 길 양쪽에 주차하는 바람에 지나가는 차가 경적을 울린다. 상대차가 나보다 조금 먼저 왔기에 내가 양보할 수밖에. 이 집도 커피맛을  장담할수 없어서 기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했다.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 걸렸다. 검색해도 마땅한 곳이 없어 마트에서 장을 봐서 집으로 가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참외와 제주은갈치를 구입했다.


집에 도착해서 뒷좌석에 둔 제주은갈치를 우선 꺼내서 차량 앞 본넷과 앞 창 사이에 두고 나머지 짐을 가지고 집에 들어갔다. 참외하나를 깎아먹으며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를 계속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꿈까지 꾼 거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잠이 깨니 해가 조금 더 지났고 갑자기 우울감이 밀려왔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헬스장으로 향했다. 1시간 정도의 가벼운 러닝머신을 하고 집에 6시 반에 도착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 회사에서 출발하면 전화해 주세요. 갈치를 구워 놓겠습니다. "  싫으면 내버려두라고 할 텐데 남편은 알았다고 했다.  


남편이 출발한다고 전화가 왔다. 그래서 은갈치를 꺼내 구워볼까 하고 냉장고를 연 순간 갈치가 보이지 않았다. 아차, 아까 짐 꺼내느라 본넷 위해 둔 것이다. 그렇게 두고 차를 몰고 운동을 가다니 그럴 모를 리 없는데 참 이상했다. 그걸 찾으러 계단을 뛰어내려 가면서 '만약 그게 없어졌다면 도대체 누가 가지고 갔을까' ' 경비아저씨한테 전화해서 방송을 해달라고 해야 하나, 뭐라고 방송하지, 갈치를 가져간 분을 찾습니다.'라고 해야 할까. 부랴부랴 주택단지 담장 바깥에 세워둔 차로 갔더니 세상에 갈치가 그대로 얹혀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갈치는 지금껏 먹어본 그 어떤 갈치보다 고소한 맛이었다. 이걸 잃어버렸으면 어쩔뻔했을까. 시간이 갈수록 더욱 부산스러워지고 기억력이 감퇴되는 것이 나이 탓이려니 하니 서글퍼지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갈치사건을 마무리로 나의 특별한 하루 휴가가 별 소득 없이 마무리되었다. 단 한 가지만 빼고 , 그건 히가시노게이고의 <악의>를 다 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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