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랜만에 필사를 하게 되었다. 갑자기 필사를 하게 된 이유는 오늘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일에 대한 상심을 잠재우기 위한 목적이 컸다.
얼마 전 집에서 우연히 홈쇼핑을 보다가 복근을 단련시키는 작은 도르래 같은 도구를 충동적으로 구매하게 되었다. 그동안 가장 경계했던 게 TV 홈쇼핑이었다. 나이 들어 이 습관에 빠지면 중독될까 두려워서였다. 그날은 우연히 그 방송을 보는 순간 남편과 내가 동시에 그걸 구입하자고 처음으로 의견일치를 보게 되었다. 최근 우리의 이슈는 운동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택배로 온 문제의 운동기구를 개시했다.
쉬운 거 같으면서도 생각보다 지루하기도 했고 이게 운동이 될까 하는 의심이들었다.
좀 더 편하게 하고 싶어서 순식간에 고개를 숙였고 내 머리카락이 그 바뀌 같은 것에 빨려 들어가서 머리카락 한 움큼이 빠져버린 것이다. 나이 들면 머리 한 올 한 올이 얼마나 소중한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정확히 세보니 20가닥이다.
남편은 사람의 머리카락이 하루에도 빠지고 새로 나는데 그게 뭔 대수냐고 하는데 정작 당해보지 않으면 그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거울을 보고 또 보고 완전 기분이 다운되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는가. 뭐 뱃살 빼는 기구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고 한 열개하다가 머리를 왜 숙였을까. 최근에 짧은 단발로 바꾸긴 했지만 긴 머리였으면 얼마나 더 비참했을지. 어리석은 자신을 자책해봤자다.
우유거품 나오는 머신으로 커피를 추출하여 책상이 있는 빈방으로 들어갔다. 요즘 입맛이 변한 건지 커피도 맛도 그닥이지만 집중하기 위해서 마시기로 했다.
집은 군 단위 읍내에 위치하고 읍에서도 산과 가까운 외곽에 있어 평일이고 휴일이고 차소리 사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가끔 낯선 곳 펜션에 틀여 박혀 있는 느낌이다. 전에 살던 아파트에선 경비아저씨가 수도 없이 방송을 했다. 쓰레기 버리는 거 강아지 찾거나 주차문제등의 방송으로 시끄러웠는데 지금의 집은 그런 방송 자체가 없어너무도 조용하다. 우리 거주지에 경비아저씨가 있기나 하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다.
상황은 집중하기 너무 좋지만.. 한 시간에 한 번씩 방문을 열어보는 남편과 그 타이밍에 집중력이 날아가는 자신이 겹쳐서 필사하다 딴청 피우는 핑계를 남편 탓으로 돌렸다. 나이 들어 까꿍 하는듯한 몸짓으로 노는 유치함이라니..
역시 공부하는 것도 엉덩이 힘이라는 걸 깨닫는다. 몇 장 필사하고는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필사를 시작한 이 책은 전에 한두 번 봤던 책 이지만 수년이 지나면서 뇌에서 블랙아웃되어버렸다. 써가며 읽는데 생소하다. 기억력이 학습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성인이 된 다음에 깨달은 진리다. 난 기억력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 끝나지 않는 여행”을 쓴 스캇펙 박사는 죽음도 삶과 함께 한다고 한다. 아득히 안개가 끼는 지점에서 죽음을 인식하고 산다는 것이 망각하고 사는 것보다 의미 있다. "나도 안 괜찮고 너도 안 괜찮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말이 삶을 사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자만심이 아닌 자기애는 사람이 남들과 더불어 사는데 중요하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남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46p.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습관이 된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지르는지 곱씹을 때마다 결국은 끊임없이 자신의 뼈를 물어뜯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면장에 대한 비난은 멈추기로 했다. 상황이 반복되면 또 어찌 될지 모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번 삶의 의미를 찾으며 죽음의 미스터리와 씨름하는 사이 ㅡ 인간은 배우기 위해서 여기에 왔다ㅡ라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고통을 대하는 태도를 가장 빠르게 변화시키는 방법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영적성장을 위해 미리 계획된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전에 사둔 A5 종이 이것도 기억이 안 난다. 사이즈도 그렇고 스프링도 없는 그냥 종이. 이것을 어디에 쓴단 말인가. 편지지도 아니고. 그렇게 방치했던 종이에 필사를 하고 있다. 도대체 이 종이 이름이 뭐란 말인가. 아직도 기억이 나지 않고 있다.
부드러운 미색종이에 진한 잉크가 미끄러지듯 선명하게 써지는 이 느낌이 너무 좋다. 다양한 잉크를 써보고 싶지만 지금 있는 잉크를 다 쓰고 사고 싶다. 더구나 오직 몽블랑 헤리티지 1912에 중독되어 다른 펜은 거의 방치하고 있어서 잉크를 더 구입할 이유가 없어졌다. 다른 펜들은 그냥 팔아버릴까 하는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다.
몰스킨 2024 다이어리
얼마 전 구입한 2024몰스킨 수첩에 이름을 써봤는데 비침도 없고 진하게 써지는 거 보니 거의 로이텀을 능가하게 질이 좋아졌다. 몰스킨에서 고객불만 사항을 반영한 듯하다. 일단 2024 다이어리는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