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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엄마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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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Jan 17. 2020

여덟살의 선과 악

그 편협함에 대하여

여덟살 첫째의 기준은 이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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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가 유치원을 그만둔 후로 우리는 거의 매일같이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이 문을 닫는 금요일엔 집에서 디즈니타임을 가진다. 아이가 제법 서사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작품을 함께 감상하고 토론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쥐가 요리하는 영화 <라따뚜이>를 보고 나서 아이는 오래도록 그 이야기를 곱씹었다. 밥 먹다 말고 뜬금없이 "라따뚜이가 먹어보고 싶다"든지. 또는 갑자기 애니메이션 성우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세상 사람들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우리 프랑스인들은 알고 있다. 가장 맛있는 음식은 프랑스에서 만들어지며, 프랑스에서 가장 맛잇는 음식은 바로 구스토 레스토랑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라따뚜이의 오프닝멘트를 줄줄 읊는다든지.


어제 오후 간식을 먹으면서도 그랬다. 또 그 오프닝멘트를 줄줄 읊기에 나도 구스토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장단을 맞췄다. "누구나 요리할 수 있습니다!"

"엄마. 근데 구스토 말고 다른 할아버지는 아무나 요리 못합니다, 그랬잖아."

"어 그치."

"근데 마지막에는 누구나 요리할 수 있다고 했어. 왜 그런거야?"

"오. 정말. 왜 그런거지? 왜 생각이 바뀐거래?"

"가장 맛있는 라따뚜이를 구스토 식당에서 먹었으니까?"

"라따뚜이가 맛있는 거랑 누구나 요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슨 상관이 있어? 아무 상관없잖아."

"상관이 있지! 가장 맛있는 라따뚜이를 래미가 만들었잖아!"


래미는 이 만화의 주인공, 재료 본연의 맛을 알고 조합할 줄 알며 사람을 지휘해서 요리하는 쥐의 이름이다. 아이가 말하는 <구스토 말고 다른 할아버지>란 구스토 레스토랑을 매우 혹평함으로써 유명요리사인 구스토의 명예를 떨어뜨리고 급기야는 죽음에 이르게 한 냉혹한 평론가를 가리킨다. 영화 말미에 그는 다시금 (혹평할 심산으로)구스토 레스토랑을 찾아가 래미가 만든 라따뚜이를 맛보게 되고 이를 통해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라따뚜이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는 다시 비평을 적는다. 비평가로서의 자신의 행적을 돌아봄과 동시에 요리사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는 이 글은 "누구나 요리할 수 있습니다."라는 구스토의 말을 인용하여 끝을 맺는다.


이 서사를 아이와의 문답을 통해서 들었을 때 막연하게 영화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지평까지 확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가끔 이렇게 아이들의 통찰력에 깜짝 놀라곤 하는데, 이게 또 항상 감동적이지만은 않다.


첫째의 페이보릿 디즈니캐릭터들과 그 이유를 듣다보면 당최 이 아이의 캐릭터를 알 수가 없어진다.

<미녀와 야수>에서는 야수를 제일 좋아한다. 야수니까. 젤 세니까. 멋있으니까. 미녀를 싫어한다. 미녀 때문에 야수랑 늑대가 싸우니까. 늑대를 야수 다음으로 좋아한다. 좋아하는 이유와 싫어하는 이유가 좀 이상하지만, 게다가 편협하기까지 하지만. 어쨌든 야수는 주인공이니까 오케이 통과.

<겨울왕국>에서는 눈괴물에 열광한다. 안나와 크리스토프를 얼음성에서 쫓아내기 위해 엘사가 만든 그 눈괴물, 맞다. 괴물이니까. 제일 세니까. 멋있으니까. (역시 안나를 싫어한다. 이유는 안나가 늑대를 때려서)안나나 엘사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유쾌한 울라프나 트롤을 좋아해보는 게 어떻겠니,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켰다. 

<라이온킹>에서는. 무려 하이에나를 좋아한다. 같은 악역이라도 주조연급인 스카를 좋아하면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야심가 캐릭터라고 포장해볼텐데. 이건 뭐 그냥 이름만 들어도 추저분한 하이에나를. 만화에서도 야비하고 비굴하고 멍청한 거 빼면 시체인 허섭쓰레기들을(시쳇말로 시체보다 못한 놈들) 베스트 캐릭터로 뽑을 건 뭐란 말이냐. 아무튼 그래서 하이에나를 바보취급하는 심바와 무파사를 무지무지 싫어한다.

"엄마 하이에나도 맹수지?"

"하이에나도 세지~사자만큼은 아니어도 맹수지~"

"난 라이온킹에서 사자는 다 고깃덩어리로 보여. 하이에나만 하이에나로 보여. 하이에나가 초원을 지배하면 좋겠다."


영화를 보긴 본거냐? 라고 묻고 싶었지만. 꿀꺽 삼켰다.

"그래. 화이팅."


그리고 마음속으로 아주 오래전의 웃찾사 유행어를 떠올렸다.

"정신세계 이해못해."


+

애들아빠한테 이 이야기를 전했더니 장문의 메시지가 왔다.


아들이 하이에나가 좋다고 하니 하이에나까지 품으려고 노력하는 아빠의 부성애. 눈물겹다.




2019년 1월에 쓴 글입니다.

글 속에서 아직 학교도 가기 전이었던 여덟살 아이는 현재 아홉살, 곧 2학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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