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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엄마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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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Jan 17. 2020

순천 낙안읍성에 갔다

매표원이 물었다, 순천시민이세요?

매표소 앞에서 자연스럽게 입장료부터 훑었다.


대인 4000

군인/청소년 2500원

소인 1500원

(순천시민 50% 할인)


이런 게 다 기억이 난다 나는. 잘아서 그렇다.

사람이 잘다.

부족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도 아니요, 일찍부터 비정한 사회의 쓴맛을 본 것도 아니다.

나는 자라면서 쭉 잘아왔고, 꾸준히 잘다.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타고난 자잘함.

나노까진 아니더라도, 꽤 어린 시절부터 마이크로급 자잘함을 자랑하는 여러 일화들을 보유하고 있다.


아까 마트도 점심도 내가 냈으니까 표는 아부지가 사겠지, 아부지 뒤에 섰다. 순천시민인 아부지 덕으로 다 같이 순천시민 할인을 받으리란 계산도 한몫했다. 서른다섯이 돼도 태생이 잘게 태어난 자는 잘다. 아부지가 낳은 자식이니 아부지는 기꺼이 나의 잘음을 감당하고 표값을 지불하실 것이다.


"아버님은 순천분이시고...따님도 순천이세요?"

"네?"

"순천시민 50프로 할인은 개인별로 적용돼요. 순천시민이세요?"

예상치 못한 전개. 순간 내 머릿속에서 합리화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순천에서 이십 년을 살았다. 주민등록증에 기재된 주소는 처음 만들었던 때 그대로, 순천시 연향동 현대아파트다. 이제 엄마아부지도 그 아파트를 떠나 순천 산골로 들어가신 지 오래건만 내 주민등록증은 현 주소지가 아닌 헌 주소지를 품고 파란색 장지갑 안에 잠들어있다. 스무 살 이래로 순천을 떠나 살아온 15년을, 그 순간만큼은 등 뒤로 하고 나는 짧게. 최대한 빠르게. 최대한 희미하게. 대답을 흘렸다.

"네"

거짓말이다. 거짓말을 할 때 사람은 말이 짧아진다. 말이 길어지면 거짓이 드러나기 쉬우니까.


"신분증 있으세요?"

"어 신분증은 놓고 왔는데요."

사실이다. 순천 주소가 기재된 내 주민등록증은 경기도 광주 우림아파트 부엌 찬장 안, 지금은 쓰지 않는 파란색 장지갑에 고이 끼워두었다. 뭐, 현주소가 기재된 운전면허증도 지금 내게 없는 건 마찬가지니까. 거짓말이 아니다. 그러니까 '지금 신분증이 없다'는 말에 한해서.


매표원은 잠깐 난감한 기색이 되었다가, 어느새 할아버지 옆에 와서 선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들, 어느 학교 다녀?"

매표원의 허를 찌르는 질문. 허억. 숨을 들이마실 뻔했다.

"광주 00초등학교요."

"...광주에 사시는 거죠?"

"네. 경기도 광주요."
그냥 네. 하면 될 것을 민망함 때문에 그나마 순천에 가까운 광주광역시도 아닌, 경기도 소재의 광주라는 것까지 내 입으로 다 불어버렸다. 밝혀지길 원하지 않았던 진실을 들킨 사람은 말이 길어진다. 까발려진 거짓말을 아무도 묻지 않은 진실로라도 덮고 싶은 것이다.


매표원의 기지가 빛나는 한판승이었다.


아부지는 제휴카드 할인으로 무료입장, 나는 대인요금 4천 원, 큰아들은 소인요금 천오백 원. 작은아들은 무료.

총 5500원을 내고 우리는 표를 끊었다. 그러니까 거짓말이 성공했다 해도 내가 얻을 수 있는 금전적 이득은 기껏해야 오천 원을 넘지 못했을 거란 이야기다.


돈 앞에서 자잘해지지 말자고. 사람이 좀 자잘할지언정 짜잔해지지는 말자고. 서른을 넘기면서부터 다짐하고 실천하고 노력했건만.

내 고향까지 와서, 50프로 할인 앞에, 고작 오천 원도 안 되는 득실 앞에, 이렇게까지 눈이 멀 일인가?

내 뒤에 내가 낳은 아이를 세워놓고, 아부지 뒤에 숨어서 짜잔해져버린 내가 부끄러웠다.


또박또박 "광.주.00초등학교"라고 대답하는 아홉 살의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그에게 엄마의 잘못을 바로잡게 한 것이 미안했다. 열아홉 살이 되어서도, 스물아홉 살이 되어서도 그가 여전히 잘아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엄마인 나 역시 다시는 짜잔해지지 않겠다고, 타고난 잘음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범법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경범죄도 범죄이므로. 시민으로서 마땅한 이용료를 지불하고, 운전자로서 신호를 지키고, 문화시민으로서 공공재를 훼손하지 않을 것을 서른다섯에 다시 한번 다짐했다. 아이에게 어떤 종류의 범법도 전수하지 않겠다.

정직하겠다. 정직하라고 가르치겠다. 정직해서 손해를 보는 일은 없다고. 정직한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는 세상은 네게 어떤 가르침도 줄 수 없다고. 그러니 세상이 어떻든 너는 항상 정직하라고.


"광주 00초등학교요"

또박또박.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아이가 말했다.

오늘은 내가, 아이에게서 배웠다.



+

잘다 : 생각이나 성질이 대담하지 못하고 좀스럽다.

짜잔하다 : '못나다'의 방언(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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