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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엄마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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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Mar 01. 2020

시간이 필요한거야

손 많이 가는 형아의 동생으로 산다는 것

주구장창 첫째 얘기만 늘어놓은 것 같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들이 하나구나 생각할 정도로. 비단 온라인에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실생활에서도 내 눈은 첫째의 동선을 쫓느라 정신이 없고 내 손은 언제라도 뻗으면 첫째가 닿을 거리에서 긴장을 늦추지 못한다. 둘째는 늘상 관심 밖이다. 첫째의 사정권 안에서 둘째가 있는 곳을 한번씩 쳐다보는 것이 전부다. 그러다 갑자기 애가 안 보인다 싶어 두리번거릴라치면 어느 새 뒤에서 나타나 엄마 옷자락을 붙들고 배시시 웃는 아이. 그럼 그렇지. 네가 어딜 가. 짧은 불안과 깊은 안도를 동시에 선사함으로써 엄마의 반가움을 극대화하는 고망쥐같은 녀석. 녀석이 뛰노는 곳에선 좀체 큰소리가 나는 일이 없다. 덕분에 나는 안심하고 첫째에 모든 신경을 쏟을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잠들고 난 후에도 사정은 비슷하다. 아직 엄마가 같이 누워야 잠을 자는 일곱살 둘째 옆에 몸만 갖다놓을 뿐, 머릿속으로는 첫째에 대한 생각들로 여념이 없다. 하루를 정리하며 일기를 쓸 때도 온통 첫째얘기 뿐이다. 첫째에 대한 희망, 기대, 낙담, 좌절, 그러다 다시 희망...내게서 뻗어나오는 신경줄기를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가장 굵은 줄기를 포함한 대부분의 줄기가 첫째에게로 향해있을 것이다. 아주 가느다란 줄기 몇 가닥만으로 나는 둘째를 돌본다. 그래서 첫째 때는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 그러니까 유치원에서 숲활동 가는 날 물통을 깜빡하고 그냥 보낸다든지, 어떨 땐 숲에 간다는 사실을 통째로 잊어버리고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보낸다든지 하는, 사소하지만 어미로서 심한 자책감에 빠져들게 하는 그런 실수들을 이 가여운 둘째에게는 종종 저지르곤 했다.


그럼에도 첫째는 엄마가 동생만 예뻐한다고 늘 불만이다. 맹세컨대 나는 균형을 유지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 속상한 일을 당하면 오래도록 속앓이를 하다가 엉뚱한 타이밍에 표출해 오해를 사는 첫째에 비해 둘째는 감정표현이 확실하고 상처를 덜 받는 성격이다. 해서 명명백백 첫째가 잘못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첫째의 입장을 훨씬 많이 헤아려주었다. 둘째는 섭섭하면 말을 하니까. 그러면 잘 들어주고 안아줘야지. 그럼 오래 기억하지 않고 금방 털어버릴거야. 그 아이는 그러니까. 그러나 상처를 덜 받는다는 것이 반복된 상처에도 쉽게 무뎌진다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아물기도 전에 다시 같은 자리에 상처를 입게 되면, 그것도 그 상처를 주는 사람이 가족이라면 둘째에게도 점점 좌절감과 배신감이라는 감정이 자리잡을 수밖에.


첫째의 성향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나는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첫째는 날 때부터 잘 먹고 잘 자고 잘 웃는 아기였다. 소음이나 낯선 환경, 새로운 경험에도 크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 모두가 아이를 두고 순하다고 했다. 그 유순함이 주변에 대한 무신경함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아이가 두돌이 되어갈 무렵, 이미 아이의 동생을 뱃속에 품고 있을 때였다. 아이는 스스로의 불편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던 것처럼 다른 사람의 불편 역시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주위의 반응이 어떻든 무심했고 주위의 반응을 살피지 않으니 행동에 경계가 없었다. 무신경하고 부주의한데다 덩치까지 또래에 비해 압도적으로 크니 아이들이나 아이엄마들에게 쉽게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안 그래도 외출이 적은 편이었는데 집 안에서 노는 날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출산일이 가까워질수록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 무신경하고 부주의하고 과격한 세 살짜리가 사방을 가로지르는 집 안에 스마트폰 액정보호필름같은, 개봉을 앞둔 쿠크다스같은 신생아를 눕혀둔다는 것이 미리서부터 아찔하기만 했다.


과연 둘째가 맞이한 세상은 형아 때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연일 형아의 괴성과 엄마의 고성, 힘조절같은 거 개나 줘버린 형아의 과감한 터치와 울어도 오지 않는 엄마를 견뎌가며 절치부심하던 둘째는 10개월에 발을 떼고 11개월에 완전한 직립보행을 해내고야 말았다.(참고로 급할 거 하나도 없던 그의 형은 13개월에 겨우 첫 발을 뗐다) 작은 몸짓에도 물개박수를 보냈던 첫째 때와 달리 둘째에겐 시원스레 칭찬 한번 해주질 못했다. 손재주가 좋아 그림도 잘 그리고 만들기도 썩 잘 하는 둘째의 작품을 보고 내심 감탄한 적이 많았지만 첫째가 지켜보고 있기에 늘 적당하게 칭찬해 줄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첫째는 알았을 것이다. 엄마가 마음속으로 제 동생을 얼마나 귀애하고 자랑스러워하는지. 왜 그런 건 당사자에게 전해지지 않고 그의 경쟁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지. 겨우 세 살에 동생을 맞아 여태 제 세상이었던 엄마와 아빠, 생활을 모두 침범당한 첫째의 서러움에 둘째의 가여움은 묻혀버렸지만 그 경중을 어찌 따지겠는가. 첫째도 둘째도, 아빠도 엄마도, 우리 모두 정말 고생이 많았다.


한때 첫째를 키우며 힘든 시간들을 둘째로 참 많이 위로받았더랬다. (세상엔 지랄총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고 하니 언젠간 둘째의 지랄을 첫째가 카바해주는 날도 오겠지. 그러니 나중에라도 첫째가 이 글을 보고 너무 섭섭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는 항상 자랑스러운 우리의 아들이니까) 눈치 빠른 둘째는 형아가 칭찬받을 때와 꾸지람들을 때의 상황을 그림에 몰입한 척, 몰펀에 열중한 척 등지고 앉아 모두 흡수하고 분석했다. 형을 보고 답습한 처세술로 쉽게 엄마를 구워삶은 둘째놈의 스킬은 넓은 세상, 유치원에 나아갔을 때 더욱 빛을 발했다. 그가 5세 여름방학과 동시에 집에 들고 온 행동발달평가표, 그러니까 성적표 비스무리한 종이를 받아들었을 때의 감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둘째의 행동발달평가표에는 이런 표현들이 주를 이뤘다.

- 자기 자신을 좋아하고 친구관계가 원만합니다.

- 규칙을 이해하고 준수합니다.

- 수업에 흥미를 보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 자연물에 호기심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놀이합니다. 


이런 평가의 말들이 그저 의례적이고 기본적인, 별 의미없이 누구에게나 적어줄 수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첫째의 행동발달평가표를 받아들기 전까지는. 그런 기본적인 표현조차 차마 쓸 수가 없어서 완곡하고 완곡하게 다듬고 다듬어 선생님의 피,땀,눈물로 쓰여진 문구들 앞에서 나는 한없이 숙연해졌더랬다. 그래봤기에 둘째의 첫 사회생활을 평가한 이 종이에 쓰여진 말들이 어느 정도는 사실에 기반한 표현들이라는 것을 알았고, 또 그래서 고마움을 느꼈다.


첫째와 둘째는 같은 유치원에 다녔는데, 이것이 둘째에게 인생 최초의 고민거리를 안겨주는 일이 될 줄은 몰랐다. 다섯살이 된 둘째가 유치원의 막내 삐약이로 입학했을 때 첫째는 일곱살로 유치원의 최고 형님반이었다. 유치원을 안 가겠다고 아침마다 울던 것도 잠시, 형아를 의지하며 잘 다니는가 싶더니 하루는 샤워를 하다 말고 심각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둘째는 샤워를 하면 몸이 노곤노곤해지면서 마음도 풀리는 모양인지, 아님 그저 형아가 곁에 없기 때문인지, 평소엔 하지 않던 비밀이야기를 많이 털어놓는다.

"난 형아반 선생님이 싫어."

"왜?"

"형아선생님은 형아를 자꾸 혼내."

"아...형아선생님이 형아를 혼내서 속상했구나."

"우리 반에서 이정우가 제일 많이 까부는데 형아는 이정우보다 더 많이 까불어."

"형아가 많이 까부는구나..."

"응 형아가 유치원에서 제일 많이 까불어."

"형아선생님이 형아를 잘 가르치느라 혼내셨나 보다. 형아 멋있게 크라고."

"그래도 형아선생님 싫어. 난 나중에 일곱살 돼서 형아반 돼도 형아선생님 반은 안 할거야."


피붙이란 그런거다. 까도 내가 까야 개운하지 넘이 까면 속상한거다. 비록 우리 반에서 제일 까부는 말썽꾸러기 친구보다도 더 까부는 일곱살 형아가 우리 형아지만, 그래도 형아선생님이 형아를 혼내는 모습같은 건 보고 싶지 않은 게 동생된 자의 마음인 거다. 제 형아가 집이 아닌 곳에서 엄마아빠 아닌 다른 사람에게 혼나는 모습이 둘째에게는 작은 상처가 되었던가 보다. 일곱살이 된 지금도 둘째는 그 때 그 형아선생님을 좋아하지 않는다. 형아선생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유치원에서 경력이 가장 오래된 베테랑 선생님이고 저에게도 늘 다정하게 대해주건만 그래도 끝끝내 마음을 주지 않으려는 둘째의 고집은 형에 대한 충정이리라.


엊그제도 샤워를 하던 중이었다. 따뜻한 물에 노곤노곤해진 둘째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현우는 참 착하더라. 친구들한테 다정한 것 같아. 맞아?"

"응. 현우 착해."

"근데 너랑 제일 친한 친구는 준하라며? 준하도 착해?"

"...."
준하는 자기주장이 확실하고 강단이 있는 친구다. 또래에 비해 똘똘한 덕분인지 대장역할을 좋아하고 친구들에게 역할을 정해주기도 한다. 가끔 둘째 얘기를 들어보면 제 역할이 마음에 안 들 때도 많지만 말을 못하고 따르는 모양이었다. 준하에 대한 둘째의 마음이 어떤지 궁금해 짐짓 모르는 척 다시 물었다.

"준하는 안 착해?"

"준하는."

"준하는 마음대로 하니까 안 착해?"

나는 답을 정해놓고 아이를 채근하고 있었다.

"아니, 시간이 필요한거야. 준하는 시간이 필요한거야."


시간이 필요한거야. 둘째의 말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가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형아를 보며 당혹스러워하는 둘째에게 나는 늘 그렇게 말했었다.

"형아는 시간이 필요한거야. 네가 클 때까지 형아가 기다려준 것처럼 우리도 형아를 조금만 기다려주자."

우리는 그렇게 마음을 넓혀갔다. 모든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 사람 앞에서 우리는 주문처럼 되뇌었다.

누구도 이상한 게 아니라고. 누구나 시간이 필요한 거라고.

모르는 걸 배우는 시간. 아프던 마음이 낫는 시간.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시간. 


내가 해주었던 말이 아이의 입으로 되돌아왔을 때, 그간 우리가 지나온 시간들은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들이었다고. 첫째가 서럽고 둘째가 가여워 부모인 내가 고달픈 날도 있엇지만, 그래서 우리는 배우고 나아가며 여기까지 왔다고. 누구에게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도 그런 시간들을 지나왔다는 것을 아이가 내게 일깨워주었다.


형아의 동생으로 지내느라 억울한 일도 속상한 일도 많았을 아이.

그래도 형아들 중에서 우리 형아가 제일 좋다는 아이.

유치원에서 받은 사탕 한 개를 꼭 쥐고 있다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형아에게 내미는 아이. 


그 아이가 보낸 사랑이 형아의 가슴 속에 켜켜이 쌓여 이제는 동생이 집에 오는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고, 유치원버스가 오는 시간에 맞춰 동생을 데리러 나가고, 데리고 들어온 동생의 외투를 걸어주고, 기분이 좋을 땐 동생의 식판까지 대신 정리해주기도 한다. 누가 시킨다고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순전히 동생의 사랑이 형아에게 전해진 덕분일 게다.

 

누구에게나 시간이 필요하다. 첫째에게 일찍부터 시간이 필요했듯 둘째에게도 언젠가 시간이 필요한 때가 올 것이다. 둘째의 기다림과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기꺼이 기다리고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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