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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엄마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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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Oct 30. 2020

우리집에 촌철살인 꿈나무가 산다

어린 것이 여간 예리하지가 않아

촌철살인 寸鐵殺人

: 조그만 쇠붙이로 상대의 급소를 찌른다.


우리집에 촌철살인 꿈나무가 있다.

이름하여 촌철하라.

그 전설의 시작.




1.

할머니. 할머니는 무슨 음식을 좋아하세요?

- 으이?

우리 가족이 좋아하는 음식을 알아오는 게 숙제예요. 할머니는 무슨 음식 좋아해요?

- 어이~그렇구나~할머니는, 할머니는 우리 하라가 좋아하는 음식이라면 다 좋아해~

할머니.

- 오야.

근데 이게 학교 숙젠데,

- 오이.

할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은 내가 좋아하는 건 다 좋아한다,
내가 이렇게 쓸 수는 없잖아요.
(by 촌철하라 - 사탕발림도 상황을 봐가면서 해라)


- 어 미안. 할머니는 냉면 좋아해.




2.

할아버지.

- 오오야.

할아버지는 내가 좋아요? 정이가 좋아요?

- 와따매~둘 다 겁나게 좋아블제~~

그러니까 둘 다 좋은 건 맞는데요, 나하고 정이 중에 누구를 더 좋아하세요?

- 오오. 나는 그. 아. 둘 다 사랑하긴 사랑하는데. 내가 알기는. 긍께 거시기 먼저 만난 거는. 하라를 먼저 만났지.

그래서 누구를 더 좋아해요?

- 그러니까 하라를 먼저 만났으니까, 그래, 거, 하라를, 하라를 더 오래 사랑했지.

할아버지.

- 오오야.

저는 누가 더 좋은지를 물어봤어요.
(by 촌철하라 - 필요없는 수사로 대화의 본질을 흐리지마라)


- 오.




3.

아빠.

- 어 왜?

내 이름은 무슨 뜻이야?

- 종이랑 연필 가져와볼래?

여기요.

- 재주 재 , 재주라는 건 어떤 일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이야.

응.

- 그리고 현은, 솥귀 현. 이거는 무슨 뜻이 있다기보다 이름에 쓰는 한자인데. 솥귀라는 거는.

아빠.

- 어어

내 이름이 무슨 뜻이냐고.

- 그니까 지금 설명하고 있잖아. 재는 재주 재. 현은 솥귀 현. 근데 솥귀가 있어야 솥을 쉽게 들 수가 있거든. 이 솥귀가 꼭 필요한 거야. 그러니까 재주가 많고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뜻인 거지.*

아니 그래서 내 이름은 무슨 뜻인데.
(by 촌철하라 - 좀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를 해라)


- ....이름은 그냥 이름이야. 뜻이 없어. 강아지는 강아지고 고양이는 고양이고 재현이는 재현이야.




4.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이 효도쿠폰을 선물해주었다.

이 집 엄마는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아들은 말 한마디 없이 쿠폰을 건넸을 뿐인데.

별안간 쓰레기가 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건실한 삶은 아니지만 그래도 재활용 쓰레기 정도는 된다고 자부해 왔는데.

이 아이의 눈에 비친 나는 핵폐기물 수준이었단 말인가.

엄마 재워주기, 엄마를 자게해주기, 도 아니고.

엄마를 <그냥> 자게 <놔두기>라니.


복잡한 심경에 <엄마를 그냥 자게 놔두기 쿠폰>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있는 나에게, 촌철하라 선생은 기어이 마지막까지 촌철을 날리시었다.

엄마.
엄마는 자는 걸 특히 좋아하니까.
자는 쿠폰은 계속계속 쓰게 해줄게!
(by 촌철하라 - …엄마가 급소를 찔린 관계로 해석불가)


...으응....고마워...




*아이의 실제 이름은 <재현>이 아닙니다.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본문에서는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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