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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엄마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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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Jul 20. 2020

기대하지 않았던 꾸준함

아이 함부로 판단하지 마라

아이를 학교에 보내기 전날 밤까지 나는 분주했다. 아이의 모든 소지품에 하나하나 이름표를 붙이고도 혹시 빠뜨린 것은 없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몇 번이나 가방을 풀고 다시 싸기를 반복했는지.


제 것이라곤 챙길 줄을 모르는 아이.

뭐 하나 빌려 쓸 주변머리도 없는 아이.

불안했다.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은 괜찮다.

제 몸 하나 챙기는 것도 버거운 아이에게 물건을 야무지게 챙겨오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물건을 잃어버림으로써 흔들릴 아이의 멘탈이 걱정됐다.


연필 네 자루를 다 잃어버리고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의 모습이, 짝궁과 같은 소지품을 가져갔다가 다툼이 생겨 억울함에 날뛰는 아이의 모습이, 주책맞게 문득문득 떠오르는 안 좋은 예감들이 돌을 던져놓은 수면처럼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나는 열심히 아이의 이름 석자가 쓰여진 스티커를 아이의 연필, 지우개, 공책, 책, 붙일 수 있는 모든 것들에 야무지게 문질러가며 불안한 마음을 눌러덮었다.


"하라야. 봐봐. 필통은 이거고, 필통 안에 연필이 네 개. 지우개 하나, 자 하나, 네임펜 하나. 여기 엄마가 네 이름 다 붙여놨지? 네 이름표가 붙은 건 다 네 거야. 네 물건은 이제 네가 챙겨야 해, 학교에선 누가 챙겨주지 않아. 혹시 잃어버리더라도 너무 걱정은 하지마. 그럴 수도 있어. 이제부터 물건 챙기는 연습을 하는거야."


아침에 현관문을 나서기 전까지 나는 아이에게 가방 어디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물건의 이름과 용도는 무엇인지를 반복해서 일러주었다.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아이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학교로 향했다.


생각보다 아이는 더 학교적응을 힘들어했다.

"선생님은 하루 종일 나만 혼내고. 친구들도 다 선생님 편만 들어.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줘."

첫날 집에 돌아와 같은 말을 반복하며 목놓아 우는 아이를 앞에 두고 나는 누구의 편에도 설 수 없어서 괴로웠다. 선생님도 이해가 되고, 친구들도 이해가 되고, 아이도 이해가 돼서 나도 그만 울고 싶었다. 그렇지만 내가 울면 아이는 마음껏 울지 못할 것이다. 눈물을 삼켜가며 아이의 눈물을 받아냈다.


등교길엔 화가 나 있고 하교길엔 풀이 죽어 있는 아이와 함께 학교를 오간 지 한달쯤 되던 어느 날, 아이의 필통을 열어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이의 연필은 어른의 손으로는 쥘 수도 없을 정도로 몽땅해져 있었다. 그러니까 아이는 연필 한 자루를 더 이상 쓸 수 없을 때까지 쓴 것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연필을 써 본 적이 있었던가? 연필은 고사하고 볼펜 한 자루도 끝까지 써 본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나는 늘상 아무데나 필기구를 굴리다 잃어버리곤 했다. 천지로 굴러다니다가도 막상 쓰려고 찾으면 없어서 다시 사게 되는 것, 내게 필기구는 그런 것들이었다. 한번도 소중하게 챙긴 적 없고, 없어도 아쉬울 것 없는.

아이는 달랐다. 아이는 한번도 내게 새 연필을 청한 적이 없다. 보다못한 내가 필통을 새 연필로 채워주려고 하면 늘상 아쉬워하며 좀처럼 몽당연필을 놓지 못했다.

"아직 좀 더 쓸 수 있는데."


1학년을 마치고 아이의 연필꽂이에 굴러다니는 몽당연필들을 꺼내 줄을 세워보았다.

길게는 8cm에서 짧게는 4cm까지.

아이는 연필 한 자루가 제 쓰임새를 다할 때까지 그를 놓지 않았다.

근검이나 절약이라기보다는 정이었던 것 같다.

손때가 묻고 감촉이 익은 제 물건에 대한 애정.


몽당연필로 가득한 아이의 필통을 보며 나는 유명한 시 한 구절을 떠올렸다.


몽당연필,

함부로 굴리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쓸모있는 사람이었느냐.


근검이든 절약이든 정이든 집착이든간에 아이는 자신의 물건을 썩 잘 챙기는 편이었다.

적어도 나보다는 훨씬 나았다.


제 몸 하나 챙기기도 힘든 녀석이 제 물건 야무지게 챙기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고.

나는 그때까지 무얼 보고 아이에 대해 함부로 판단했을까?


어쩌면 아이를 가장 편견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었던 건 내가 아닐까?


아이,

함부로 판단하지 마라.

너는

연필 한 자루 끝까지 써 본 일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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