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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엄마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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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Jun 23. 2020

뭐가 그렇게 미안하세요

습관처럼 사과하는 보호자들

tvn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


- 문영 : 이렇게 머리끄댕이 잡는데 소리 안 지를 사람 있나? 봐, 당신도 지르네.

- 여자 : 아니 그러면 웬 미친놈이 애한테 해코지를 하는데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어?

- 문영 : 정신과 의사세요? 미친 걸 어떻게 아셨대?

- 여자 : 허 그거야....막...말을....막 주절주절....막 이상하게 하니까...

- 문영 : 미친년.

- 여자 : 뭐야?

- 문영 :  아니 말을 막 주절주절 하시길래 미친년인 줄 알았지.




여름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바닷가에 간다.

적어도 두 번 이상, 바다에 가서 파도를 타고 놀아야만 부모로서 그 해 여름의 의무를 다 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바다에 도착하자마자 입수금지령이 내려지는 바람에 마지막 물놀이를 모래놀이로 대체하고 돌아와야 했던 어느 해 여름엔 그 다음해 여름까지 두고두고 까이느라 내가 바닷가의 모래가 될 뻔 했다. 아이들은 작정하면 우는 소리로 사람도 죽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이유로 나와 아이아빠의 정신건강을 위해 매년 여름, 해수욕장 개장일과 폐장일 즈음에 맞춰 꼭 바다를 찾는다.

작년 여름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직 개장도 하기 전인 6월부터 바닷가로 향했다. 한산한 모래사장에서 아이들은 물총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눈치를 말아먹은 녀석들이라 나는 바짝 긴장한 채로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공공장소에서 아이들의 실수는 곧 부모의 부주의를 의미하기에 경우없는 부모라는 시선을 받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나는 계속 아이들에게 입을 대며 얼마 있지도 않은 주변을 의식했다.

"사람 없는 쪽으로만 쏴!"

"어어 사람이 지나갈 때는 쏘지 말고 기다려!"


앗차, 할 새도 없이 갑자기 누군가 시야로 뛰어들었다.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아이들 곁에 바짝 선 그 아이는 대략 열네다섯살 정도 되어보이는 커다란 소년이었다. 한참이나 어린 아이들로부터 물세례를 받고도 잔뜩 설레보이는 표정, 살짝 어색한 몸짓, 얼른 나오지 않는 말소리,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장애가 있는 친구였다. 뒤이어 쫓아온 아이엄마가 내가 뭐라 말 할 새도 없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애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놀라셨죠. 애기들아 미안해."


생각지도 못한 사과였다. 우리 아이들이 쏜 물총에 맞아 그 친구의 옷이 젖었으니 우리가 사과를 해야 마땅한데 이 엄마는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과 말투로 우리에게 당치도 않은 사과를 건넸다. 나는 황급히 손사레치며 상대의 사과를 돌려주려 했다.

"아니에요. 제가 애들을 조심시켰어야 되는데...옷이 젖어서 어떡하죠..."

"아니에요. 얘가 나오니까 신이 나서. 애기들 노는 데 갑자기 뛰어들면 어떡해. 자, 아빠한테 가자."

아이의 손을 잡고 서둘러 아빠에게로 향하는 그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가만히 목이 메었다.


물 만난 첫째




첫째에게는 일곱살 이후로 항상 불안한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ADHD, 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장애. 경계성 장애라는 말은 곧 '어정쩡하게 이상하다'는 소리다. 아주 이상한 것도 아주 정상인 것도 아닌 상태. (아주 이상하다는 표현이 장애아동의 부모들에게 상처가 될까봐 두려워하면서도 굳이 이 표현을 쓰는 것은 아이에 대해 내가 갖는 감정을 날것 그대로 적고 싶었기 때문이다)사람들은 아이의 어정쩡하게 비상식적인 행동 앞에서 화를 내야 할지 가여워해야 할지 혼란스러워 했다. 자칫 화를 냈다가 아이에게 장애가 있는 걸 나중에 알게 된다면 몹시 미안해질 것이며, 그냥 가여워하고 넘어가자니 장애아가 아니라면 이런 식의 행동은 분명 문제가 있었기에. 화를 내는 사람과 가여워하는 사람, 누구에게 동감해야 할지 나조차도 헷갈렸다. 아이에게 장애가 있을거라 짐작하고 동정을 표하는 사람과 아이가 비장애인이라고 확신하고 상식에 가까워지기를 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몰랐다.


그럴 때마다 말아톤의 초원이엄마가 떠올랐다. 사람들의 냉대어린 시선 앞에서 "우리 아이에게는 장애가 있어요." 울부짖던 초원이엄마. 나는 그렇게 말할 수도 없었다. 아직은 또래에 비해서 한참 부족한 경계성 장애아지만, 언젠가 경계를 벗어나 훌훌 날아오를지도 모르니까. <장애>라는 말로 이해를 구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이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당장 지금 우리를 조금은 너그럽게 봐주기를 기대하는 것. 그것 뿐이었다. 우스갯소리로 나는 친구들에게 "난 동네에서 상체가 없어. 아예 접고다녀서."라고 말할 정도로 나는 준비된 apologizer(사죄하는 사람)였다. 사과의 표정, 말투, 제스처가 날이 갈수록 능숙해지고 있었다.




그러다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전라도의 한 바닷가에서 내가 너무나도 잘 아는 표정, 말투, 제스처를 맞닥뜨리게 된 거다. 그때까지 나는 장애아동에게 이 사회가 관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겉으로 봐서는 티가 나지 않는 경계성 장애아동보다는 특징이 드러나 보이는 장애아동에게 사람들은 더 너그러울 것이라고, 멋대로 단정지었다. 헌데 왜 그 엄마는 사과를 받아야 할 순간조차도 내가 동네에서 지어보이던 표정과 몸짓을 그대로 내게 건네고 황급히 우리에게서 멀어져 가는 걸까. 아이를 데리고 가는 뒷모습에서조차도 송구스러움을 뚝뚝 떨어뜨려 가면서. 나는 뭐라고 더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건네도 그보다 더 자신을 낮추는 말이 돌아올 것이라는 걸 나는 잘 알았다. 동네에서의 내 모습이 꼭 그랬으니까.


그간 얼마나 많은 시선과 반응이 저 엄마의 어깨를 저렇게 움츠러들게 한 걸까. 여름 한낮에도 추워보이는 그녀의 어깨를 다가가서 꼭 안아주고 싶었다. 동정이 아닌 동병상련의 정으로.


문득 친구의 시어머니가 떠올랐다. 친구의 손위 시누이는 5세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손위 시누이를 두고 시어머니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처음에 의사가 잘해봐야 다섯 살 수준일 거라고 하더니. 저봐라. 점점 똑똑해져서 열네댓살 몫을 하잖냐. 우리 다 죽고 나면 저 혼자 남아서 세상 제일 똑똑해져 있을거다. 야야 웃지마라. 내 말이 농담같으냐. 두고봐라 틀림없이 그럴거니까."


어떤 부모가 자식에게 걸어둔 희망의 끈을 놓을까. 장애아동의 부모가 아이에게 거는 기대는 경계성 장애아동의 부모인 내가 거는 기대보다 작을 거라고, 장애아동의 부모는 장애라는 이름 아래 쉽게 보호받을 수 있을 거라고 혼자 속단해버린 건 순전히 나의 짧은 생각에서 비롯된 편견이었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과 싸우고 있었다. ADHD아동을 키우면서도 '완전 이상'과 '어정쩡하게 이상'을 나눠놓고서 그들의 입장과 나의 입장이 다르다고 믿었던 나의 편협함과도.


그러니 정작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나였다.

그날 건네지 못한 사과가 마음에 남아 아직도 부끄러움으로 되살아나곤 한다.

오늘 이렇게 드라마를 기사로 보다가도.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 이미지 출처 :

https://entertain.naver.com/read?oid=312&aid=0000449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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