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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Jan 13. 2021

한겨울밤의 꿈 같았던 출간제안

나아갈 힘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출간˙기고 목적으로 000님이 제안을 하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브런치에 등록하신 이메일을 확인해주세요.

저 방정맞은 느낌표는 몇 번을 봐야 무뎌질까. 가만 있는 사람을 느낌표로 흔들어놓고 갑자기 저 혼자 차분하게 마침표를 찍는 다중인격 알림에 몇 번을 속았는지 모른다. 입으로는 "에이 뻥치지마."라면서도 자꾸 밀려드는 기대는 어쩔 수가 없다. 울렁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메일함을 열었다.


[brunch] 작가님께 새로운 제안이 도착하였습니다!

기대하지마.

설레발치지마.

나대지마 심장아.


떨리는 마음으로 발신인의 소개와 이력을 읽어내려가다가 마지막 문장에서 멈칫했다.

(...)책 출간 제안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전화나 메일로 연락해주세요.

진짜라고? 진짜 출간 제안이라고? 몇 번을 읽고 또 읽어도 출간제안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혹시 자비출판 권유가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이 피어올랐고 그때부터 몸이 달았다.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 출간비는 누가 부담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메일을 확인한 날은 일요일. 휴일에 일과 관련된 전화를 거는 건 예의가 아니다. 예의도 예의지만, 너무 간절해보인다. 진짜 간절하니까 간절해보이기 싫다. 한나절을 꾹 참고 일요일 밤에 메일을 보낸 뒤, 월요일 아침 9시에 문자를 넣었다.

안녕하세요, <ADHD가 어때서>를 쓴 날필입니다. 메일로 답신드렸습니다.

다 틀렸다. 아마 엄청 간절해보였을 것이다.


오전 내내 자비출판 권유라고 결론내렸다가 혹시 모를 기대를 품었다가를 백이십번쯤 반복했을 때, 오후 두시쯤 전화가 걸려왔다. 출판기획자이며 작가로 자신을 소개한 그 분은 출판사가 나아가고 싶은 방향과 기획하고 있는 활동들에 대해 진솔하게 들려주었다. 더불어 내 책에 대한 아주 유용한 조언도 해주셨다. 마음이 기울었다. 한 시간 남짓의 통화 끝에 나는 마침내 대놓고 여쭈었다.

"그러니까, 자비출판은 아닌거죠?"

건너편의 신사분이 호탕하게 웃었다.

"작가님은 돈 말고 글만 쓰시면 됩니다. 글 쓰다가 맛있는 거 드시고 싶으면 그건 작가님이 사드세요."

자비출판 권유가 아니었다! 막상 내가 바라던 출간제안임을 확인하자 얼떨떨했다. 이제...어쩐다?




브런치북 수상자 발표 이후로 나는 절치부심하는 마음으로 <ADHD가 어때서>를 출판사에 투고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300개의 출판사에 투고해야 나와 맞는 출판사 한 두 곳을 찾을 수 있다기에 하루에 다섯 군데씩, 총 60일을 투고기간으로 잡았다. 메일함에 출판사의 답장이 도착할 때마다 나는 거절에 담담해졌다. 이런 식으로 300개의 출판사로부터 모조리 거절당하면 마침내 이 책을 놓을 수 있을 거라는 이상한 목표가 생겼다.


그러던 중에 천만뜻밖에도 브런치를 통해 출간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무조건 잡아야 한다. 무조건 잡아야 하는데...넙죽 절을 해도 모자랄 판에 이 망설임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망설임의 실체를 알기 위해선 시작점으로 돌아가야 했다.


투고를 위해 한글파일로 만들어놓은 원고를 다시 열어보았다. 서두에 어설픈 출간기획서를 첨부한 것 외엔 초고 그대로의 상태였다. 어수선한 목차, 정돈되지 않은 글, 에세이인지 육아서인지 애매한 포지션. 최선이라 생각하고 덮어놓은 미완성 원고가 보였다. 그동안 이런 걸 최선이랍시고 출판사에 투척했구나. 글이 아니라 폭탄을 던졌구나. 부끄러웠다. 이게 나의 최선이라면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가 될텐데, 한계를 내보이고도 당당할만큼 나는 이 책에 최선을 다했던가? 자신이 없었다.


출간계약이 주는 안정감을 포기하고 다시 초조함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건 미친 짓이다. 나는 나를 잘 안다. 현실에 안주해 '적당히'를 추구하는 삶. 앞으로 살아갈 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태 그래왔듯 눈 앞의 물컵을 집어 당장의 갈증을 채우고 싶었지만, 타는 목마름으로 메일을 썼다. 이번만큼은 다르게 살고 싶다.


안녕하세요.

어제 작가님(서로에 대한 호칭을 작가님으로 통일)과의 긴 통화 후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부족한 제 글을 읽어보시고 적절한 피드백을 주신 점,

이렇다 할 이력이 없는 저에게 과분한 제안을 해주신 점,

많은 시간을 할애해 작가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점,

하나하나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제 다시 한번 제 원고를 읽어보며 아직은 책으로 출간할 수준이 아님을 확인했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퇴고의 고통이 두려웠기에,

그저 투고횟수로 작품의 부족함을 채우려 했나봅니다.


작가님은 좋은 기획자십니다.

계약조건을 떠나 작가님의 진정성있는 이야기와 깊은 통찰력에 마음이 끌린 것이 사실입니다.

믿을 수 있는 기획자와 출간계약을 하면 당장 마음은 편하겠지만, 그만큼 퇴고에 대한 제 열정이 느슨해질까 두렵습니다.


당분간은 투고도, 출간도 보류하고 원고의 질을 높이는 데 집중하고 싶습니다.

스스로 이만하면 됐다 싶을 정도의 원고가 완성되면 그때는 제가 먼저 투고메일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작가로서도 기획자로서도 좋은 성과를 얻으시길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곧 답신이 왔다.


조금 늦더라도 후회 없는 결과물을 내놓고 싶다는 말씀 깊이 공감합니다.  

좋은 작가가 되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멋진 모습으로 다시 만나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따뜻하고 진심이 담긴 답변에 다시금 아쉬워졌다.

다시 이런 분을 만나 이런 제안을 받을 수 있을까.

이게 정말 잘한 짓일까.


물은 엎질러졌다.

내 손으로 쏟아놓고 밤늦도록 목마름에 몸부림치는 중이다.

오늘까지만 찌질하고 내일부터는 이 초조함을 퇴고에 쏟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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