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엄마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필 Dec 17. 2020

둘째가 자꾸만 신발을 고른다

"집에 신발은 많지만 이 신발은 여기에만 있잖아."

첫째의 신발이 작아졌다. 저녁식사 후 집 근처 아울렛으로 향했다. 첫째의 신발은 고민하지 않고 쉽게 산다. 가격대가 비싸도 부담이 없다. 둘째가 물려신으면 되니까. 값을 더 지불하더라도 만듦새가 좋아 가볍고 편하면서도 오래 신을 수 있는 신발을 사는 게 합리적이다.


제 신발을 사러 나왔건만 첫째녀석은 도통 신발 고르는 데 관심이 없다. 혼자 분주하게 신발을 들어보고 요리조리 돌려보던 엄마가 "이건 어때? 저건 어때?" 들이밀어도 "아무거나.", "엄마 마음에 드는 걸로." 심드렁하게 단답으로 일관할 뿐이다.


한켠에서 가장 바쁜 건 오늘의 외출과 하등 상관없는, 깍두기(그는 형아친구들과 놀 때도 늘 깍두기를 자처한다)둘째다. 새로 나온 슈퍼히어로 신발은 없는지, 또 다른 캐릭터 신발이 출시되진 않았는지 유아신발업계의 최신유행과 출시동향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다.


"엄마,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게 있는데"

신발가게에서 보여주고 싶은 게 신발이지 달리 뭐겠냐만 그는 결코 '신발'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은 채, 도통 제게 관심을 주지 않는 엄마의 손을 잡고 슬며시 제 pick 앞으로 이끈다. 전혀 사줄 생각이 없는 엄마는 그의 의중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와 멋지네." 대충 탄성을 한번 내질러주고 이내 다시 형의 신발을 고르는 데 열중한다.


"엄마, 좀 미안한 말인데 나도 신발 하나 사주면 안 될까?"

미안한 말이면 응당 삼켜야하거늘 몹시 미안한 표정으로 기어이 해버리고 마는 것이 둘째의 <사줘>레파토리다. "정아, 정이 신발은 집에 엄청 많이 있잖아. 형아는 신발이 작아져서 맞는 신발이 하나도 없으니까 사주는거야." 이건 엄마의 <거절>레파토리.


집에 그리도 많다는 둘째의 신발은 죄다 형아, 형아친구, 아빠친구아들로부터 물려받은 중고들이다. 하나같이 브랜드신발이고 깨끗하게 신은 A급 중고이지만 둘째의 취향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둘째의 것들이다. 그러니까 그는 자기 손으로 고른 신발을 발에 꿰어신은 경험이 손에 꼽는다.


둘째는 눈으로나마 하염없이 신발을 쓸어본다. 차마 신어보자는 말도 못하고 신발 주변을 맴돈다. 둘째 모르게 둘째가 고른 신발을 곁눈질했다. 걸을 때마다 양발에 번갈아 불빛이 들어오는 스파이더맨 부츠. 진짜 별로다. 59000원. 완전 과하다.


가만 있자, 집에 둘째 부츠가 있던가 없던가. 형아가 신던 것, 형아친구가 물려준 것까지 190사이즈 부츠가 두 켤레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새 부츠를 살 이유가 없다. 한 철 신을 부츠를 세 켤레나 가지고 있는 건 공간낭비에 돈낭비 아닌가. 둘째만 마음을 돌리면 우리는 현명한 소비자로 남을 수 있다.


"정아, 집에 부츠가 두 켤레나 있잖아."

"엄마, 그렇지만 이 부츠는 여기에만 있잖아."

사뭇 결의에 찬 대답이 돌아왔다. 맞다. 네 말이 맞다. 이 부츠는 여기에만 있다.




집에 많은 게 비단 둘째의 부츠뿐이랴. 옷장은 철철이 사모으는 내 겉옷들로 터져나갈 지경이며, 창고에는 매년 업그레이드되는 남편의 캠핑장비들이 그득그득 들어차있다. 자켓이 차고 넘치지만 굳이 소재가 다르다는 이유로 가죽자켓을 장바구니에 담는 내 마음과 텐트가 있으면서도 타프까지 갖추고 싶어하는 아이아빠의 마음.


집에 제 신발과 옷이 아무리 많아도 가끔은 스파이더맨 부츠가, 사슴벌레 티셔츠가 사고 싶은 아이의 마음과 무엇이 다른가? 더군다나 그는 '새것'을 '내것'으로 삼을 기회가 형에 비해 현저히 적었던 둘째아들이 아닌가. 부츠라고 다 같은 부츠겠는가. 어리다고 소비욕을 모르겠는가. 동일한 욕구 앞에 왜 둘째만 현명해져야 하는가.


59000원이라...이번달 알바비가 언제 들어오더라,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돌렸다.

"이 신발 190사이즈로 보여주세요."

제 발사이즈도 모르는 둘째는 제 신발 찾아달라는 얘기인지도 모르고 '여기에만 있는 부츠'를 눈에 담느라 정신이 없다. 제가 보던 것과 같은 신발을 점원이 들고와 제 발 앞에 놓자 그제야 놀란 눈으로 엄마와 신발을 번갈아 쳐다본다.


"한번 신어볼까?"

대번에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던지고 스파이더맨 부츠에 쑥 발을 집어넣는 둘째. 딱 맞다. 물려신을 동생도 없는데. 내년 겨울까지 신을 수 있게 한 치수 큰 신발을 사야 하나. 잠깐 고민이 됐다. 첫째의 신발이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딱 맞는 신발을 샀겠지. 그래, 본전같은 거 안 뽑아도 좋다. 고작 새 부츠 한 켤레에 세상을 다 얻은 듯 함박 웃는 둘째의 얼굴이면 본전은 이미 다 뽑았다.


집에 오는 내내 둘째의 양쪽 발에서 불빛이 반짝거린다. 발만 쳐다보며 걷는 둘째의 뒤통수가 연실 싱글벙글이다. 둘째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다짐했다.


한해에 한번은 새 신발을 신겨줄게.

집에는 없는 신발, 엄마가 사줄게.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빽으로, 랜선시화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