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 중에 울리는 벨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웬만큼 급한 사안이 아니고서야 저녁식사시간에 남의 집 전화기를 울리는 일은 좀처럼 없던 시절, 연락수단이라고는 집집마다 놓인 전화기 한 대 뿐이고, 친구와 통화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친구부모님께 안부를 여쭙고 본인의 신원을 밝혀야만 했던 20세기 끝자락의 일이다.
"여보세요? 네 맞는데요. 아. 안녕하세요. 네. 네에?"
통화 중에 끝이 과도하게 올라가는 '네?' 또한 불길했다. 저런 건 전라도의 의문문이 아니다. 황당함과 불쾌함을 드러내기 위해 의도된 억양임에 틀림없다.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우리는 계속 식사를 했다. 누구를 찾는 전화일까. 수화기를 내려놓은 엄마는 과연 누구의 이름을 부를까.
"우리 애는 여리고 순해서 누굴 놀리고 다닐만한 애가 아닌데요. 뭘 잘못 아신 것 같네요."
전화를 끊고 식탁으로 돌아온 엄마는 별 말 없이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성질이 급해 매도 빨리 맞아버려야 속이 편한 내가 기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엄마 누구야?"
"유진이 엄마라는데? 너네 반에 유진이라고 있냐?"
"유진이? 유진이 엄마가 왜?"
"니가 유진이를 놀려서 유진이가 울었다는데?"
내가 유진이를 놀렸으면 어쩌려고, 엄마는 호언장담을 하고 전화를 끊어버린걸까. 나는 엄마의 말처럼 마냥 여리고 순하기만 한 아이는 아니었다. 한번 오기가 발동하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덤벼들어서 설령 내가 지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의 기분도 똑같이 망쳐주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독종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유진이를 놀리지 않았다. 놀리는 건 고사하고 1년 내내 말도 제대로 섞어본 적이 없다. 유진이는 늘 일찍 등교하고 제시간에 하교해 학원으로 향하는 모범생이었던 반면, 나는 9시 직전에 교문을 통과하고 매일같이 나머지 공부를 한 뒤 집에 돌아와 곧장 TV앞에 앉는 낙제생이었다. 활동시간대도 활동영역도 다른 유진이를 내가 무슨 수로 놀린단 말인가.
진범은 다음날 밝혀졌다.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주'씨 여자아이였다. 이름 뿐 아니라 성까지 비슷한 내가 용의선상에 올랐던 건 충분히 가능한 해프닝이었다. 내게서 사건의 전말을 전해들은 엄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당연하지. 신경도 안 썼다 나는."
엄마는 나를 믿었다. 대뜸 내 이름을 대는 같은 반 학부모의 전화에도 엄마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엄마가 그토록 나를 믿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엄마가 계속 당당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믿는 엄마가 나로 인해 부끄러워지는 건 원하지 않았다. 언제나 엄마가 당당할 수 있도록, 엄마의 당당함이 뻔뻔함이 되지 않도록, 그 후로도 나는 친구를 놀리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았다. 혹시 나 때문에 누군가 마음을 다치진 않았을까, 지난 언행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이만큼이나마 바르게 자란 건, 그날 대책없이 나를 믿어버린 엄마의 믿음 덕분이다.
오늘 내 아이를 키우며 엄마처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비로소 깨닫는다. 다른 사람의 책망 앞에 내 아이부터 추궁하게 되는 나의 조바심은 아이를 위함도 아니요, 타인을 위함도 아니요, 나 자신을 위함이었다. 개념있는 부모, 교양있는 지성인으로 보이고 싶다는 인정욕구가 내 아이의 마음을 살피는 모정보다 앞섰던 것이다. 아이는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이며, 그렇기에 언제든 쉽게 그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착각 하에 나는 그간 얼마나 내 아이를 홀대했던가. 엄마의 믿음에 뿌리내려 자란 내가 왜 내 아이는 믿음으로 단단히 붙들어주지 못했을까.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보다 아이에게 어떤 엄마로 남을지, 아이가 평생 가져갈 엄마에 대한 기억이 어떤 것들일지가 내겐 훨씬 더 중요하다. 누구보다 내 아이를 믿을 것이다. 내 아이를 믿는다는 것이 타인을 등한시하겠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가장 가까운 존재의 단단한 믿음은 앞으로 아이가 맺어갈 모든 관계의 첫 연결고리가 된다. 나는 아이와 세상을 잇는 첫 고리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면서 나 또한 나의 엄마처럼 내 아이에게 전폭적인 믿음과 지지를 보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