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경계를 가르치는 일에 대하여
올해 1학년이 된 작은아이의 등교길에 여태 따라나선다. 늘 나보다 앞서 달려가 버리면서도 교문 앞에선 꼭 나를 기다리는 작은아이. 교문 앞에서 엄마를 보고 학교에 가야 마음이 놓인다나. 제 마음이 놓인다는데, 그것도 못해줄까 싶어 나는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보이지도 않는 아이를 쫓아 부지런히 걷는다.
웬일일까. 길 모퉁이에서 나를 기다리고 서 있던 아이가 불쑥 노란 것을 내민다. 애기똥풀꽃이다. 이제 막 꺾인 줄기 끝으로 노란 액즙이 동그랗게 맺혀있다. 귀엽다. 작은 꽃이 귀엽고, 저 닮은 것을 들고 선 아이도 귀엽다. 조심스럽게 받아들어 꽃이 상하지 않게 쥐었다.
내게 꽃을 건네고 금세 달려가 보이지 않게 된 아이를 따라가며 생각한다. 나는 아이에게 고마움을 표해야 했을까, 가르침을 주어야 했을까.
"꽃을 함부로 꺾으면 안 돼."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어 꿀꺽 삼키느라 "정말 예쁘다, 고마워."도 함께 넘어갔다.
꽃을 꺾어서는 안 된다. 살아있으니까, 모두가 함께 보고 즐길 수 있도록, 그 자리에 두어야 한다고 그렇게 배웠다. 배운대로 아이에게 가르쳐왔다. 그래도 아이들은 순간순간 가르침을 잊고 손을 뻗는다. 꽃을 꺾는 여덟살의 마음 안에는 '무자비'와 '이기심'만이 가득할까.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마음, 아름다움을 탐하는 마음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 마음을 꺾는 것과 꽃을 꺾는 것, 어느 쪽이 더 무자비할까. 지금 어른이 되어 규범을 가르치는 나는 어릴 적에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꺾어본 일이 없는지.
아이를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 손 안에서 시들어가는 꽃이 안타깝다. 꽃은 자연 속에 피어있을 때가 가장 예쁘다는 걸, 꽃을 꺾어본 아이는 안다. 살아서 꿈틀대던 생명이 얼마나 쉽게 사그라드는지, 살아 싱싱하게 빛나던 것이 내 손에서 생기없이 늘어질 때의 죄책감이 얼마나 오래 가는지도, 스스로 깨달으며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키워간다. 교과서에 쓰인 문장과 어른들의 말로 '꽃을 꺾으면 안 된다'는 이유를 아무리 들어봐야 손 안에서 시들어버린 꽃을 보며 안타까워본 경험만큼 강렬할 수 없다.
여전히 샛노란 꽃과 피지 않은 세 개의 봉오리를 하얀 식탁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아이가 돌아올 즈음엔 완전히 시들어버리고 말겠지. 아이가 이게 뭐냐고 물어오면 네가 아침에 내게 준 애기똥풀꽃이라고, 고마움도 나무람도 담지 않고 그저 그렇게만 말해줄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