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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엄마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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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Jun 03. 2022

잘못 뱉은 말은 칼이 된다

칼끝이 내게로 향할 땐 이미 늦다

입 밖으로 낸 순간부터 목구멍에 딱 붙어 넘어가지 않는 말이 있다.

칼인 줄도 모르고 뱉은 말이, 내 속에 계속 생채기를 낸다.




부모교육 강의를 준비하면서 두달 내내 갈팡질팡했다. 나는 좋은 부모인가? 내가 누군가에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침을 시전할 됨됨이가 되나? '부모'와 '교육'이라는 결코 만만치 않은 단어들의 조합에 몹시 위축되었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자.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나의 언어로 풀어내면 그뿐이다.


3월 3일.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강의날 아침이 밝았고, 나는 어느새 강단 앞에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강의를 들으러 오신 분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 내가 아무리 강의를 못해도 이 강의는 열 명 안팎의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이므로, 처참한 실패는 아닐 터였다. 이게 다 오미크론 때문이라며 나를 위로하는 두 분 사서님을 향해 웃어보이며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오히려 좋아,요.'

중간중간 말문이 막혀 당황하기도 했지만 따뜻한 호응에 힘입어 준비한 것들을 모두 쏟아냈다. 순식간에 두 시간이 지나가고 마침내 마지막 관문, 질의응답만 남았다.



"제 아이는 주로 당하는 편이에요. 유독 한 친구를 만나면 그런 경우가 자주 생기는데요, 이런 경우 제가 아이를 위해, 또 상대 아이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충분히 예상가능한 질문이었다. 머릿속으로 답변을 정리한 뒤, 여유있게 입을 열었다.


두 아이를 떨어뜨린 뒤 맞은 아이의 마음을 충분히 달래줄 것, 때린 아이에게 "사람은 사람을 때리면 안돼. 그건 잘못된 행동이야."라고 있는 그대로 알려줄 것, 만날 때마다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당분간 어울리는 자리를 피할 것. 나름의 대처법을 제시하다가 나는 마지막 항목에 대한 부연설명을 위해 아래와 같이 덧붙였다.


"유독 한 아이 주변에서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어요. 제 아이도 그런 아이였고요. 만약에 때리는 아이의 부모님이 제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저는 그런 자리를 줄이라고 권할 거예요. 대개 아이의 잘못된 행동은 부모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잖아요. 특히 두 돌 전후의 아기들은 더 통제가 어렵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일을 저지르고요. 그런데 이런 일이 반복되면 남들은 물론이고 아이 스스로도 자기 자신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돼요.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굳이 아이를 문제가 될 만한 상황에 데려다놓을 필요가 없다는 거죠. 당장 조급한 마음에 자꾸 아이를 노출시키기보다는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진 모습이 보일 때, 조금씩 기회를 만들어주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때리는 아이의 부모님들은 제게 고민을 털어놓는 경우가 드물어요. 꼭 당하는 아이의 부모님들이 주로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한동안은 무사히 강의를 마쳤다는 고양감에 들떠 내 잘못을 깨닫지 못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문제의 발언이 시도때도 없이 마음을 짓누르기 시작한 건. 처음엔 애써 털어냈다. 나쁜 의도는 없었다고, 그저 가벼운 농담이었다고, 모두가 웃어보였고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고. 유리한 정황을 떠올리며 내 발언을 합리화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편치 않을까. 덮으려고 할수록 더 선명해지는 문장들이 내 속을 헤집어놓았다. 나는 왜 불편한가. 나의 불편함을 정면으로 바라보기로 작정한 지 단 몇 분만에 나는 불편함의 근원을 찾아냈다.


'내가 만약 아이의 폭력성 때문에 혼자 끙끙 앓다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강의를 찾은 ADHD아이의 부모였다면, 그 말을 듣고 웃을 수 있었을까?'

아니. 결코 웃을 수 없다. 혹시 남이 아이를 안 좋은 시선으로 볼까 두려워 아이에 대해 섣불리 털어놓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아이를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한 채 노심초사 애면글면 얼마나 애를 태웠던가.


때리는 아이의 부모님들은 제게 고민을 털어놓는 경우가 드물어요.
꼭 당하는 아이의 부모님들이 주로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당하는 아이와 때리는 아이, 양쪽 부모를 편 가르고 은근히 한쪽을 깎아내리는 발언이었다. 나와 내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부모들, 어쩌면 비슷한 성향의 아이를 키우며 나와 같은 고통을 겪어왔을 부모들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해버린 걸까.


낯선 사람들의 무심한 말이 얼마나 아프게 가서 박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그래서 더 아프게 다가갔을 말을, 그날 그 자리에서 뱉은 것, 씻을 수 없는 잘못이고 수치였다. 누구도 내게 따져묻지 않았지만, 그래서 묻어버리고도 싶었지만, 잘못을 바로잡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아이가 사람들 속에 어울려 즐겁게 살아가는 날을 학수고대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고 있을 수많은 부모님들께 용서를 구하고 싶다. 용서를 구한들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고 내가 만든 칼은 잊을 만하면 날을 세워 내게 돌아오겠지만, 그렇게라도 조금이나마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무뎌지지 않고 기꺼이 아픔을 감내하겠다.



그날, 그 자리에 계셨던 분들께


죄송합니다.

경솔하게 말을 뱉어놓고 제 말에 저도 아팠습니다.

차마 제가 제일 괴로웠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지, 짐작이 되어 더욱 참담한 심정입니다.

이미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지만 제 잘못을 잊지 않겠습니다.

입에서 나갈 말 한 마디의 무게를 가벼이 여기지 않겠습니다.

더 사려깊고, 신중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제 말에 상처받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조은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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