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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아는 맛 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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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Sep 01. 2022

알리오 올리오 두 접시,
그리고 두 친구

우리가 서로를 예뻐했던 날들

선영언니가 왔다. 글 속에선 가급적 지인들의 실명을 밝히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다. 내게는 많은 선영언니가 있다. 하나같이 좋은 언니들이다. 선영이라는 이름에는 정말 선하고 맑은 기운이 깃들어있는 것인지, '선영'치고 나쁜 '선영'은 본 적이 없다. 이 글의 주인공인 선영언니로 말할 것 같으면, 내 휴대전화에 '선영언니' 네 글자로만 저장되어 있는 유일한 선영언니다. 부러 성을 붙이지 않아도 바로 알아볼 수 있는, 나의 첫 선영언니.


우리는 대학 동기로 만났다. 입시에 실패한 전적이 언니와 나를 끈끈하게 묶어주었다.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수많은 장수생들 사이에서 유독 서로에게 이끌렸던 걸 보면 말이다. 언니는 늘 바빴다. 언제나 두 개 이상의 알바를 했고, 언제나 어딘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통화내용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재수 시절의 친구들인 모양이었다. 언니는 말을 많이 하기보다 주로 들어주는 편이었는데, 나를 앞에 두고 통화가 길어질 때면 가끔 서운한 마음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그 일 외에는 이상하리만치 언니에 대해 서운한 기억이 없다.


서운한 마음을 오래 품을래야 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뭄에 콩 나듯 알바를 쉬는 날, 언니는 자신이 일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나를 데려갔다. 직원할인을 받는다고 해도 알바로 생활비를 충당하는 대학생에게 두 사람 몫의 밥값은 적지 않은 지출이었을 텐데 언니는 내게 돈을 아끼는 법이 없었다. 내가 처음 접해보는 고급문화(?)에 황홀해하는 동안, 맞은편의 언니는 하염없이 새우를 깠다. 깔끔하게 손질된 새우를 사이다가 담긴 컵에 퐁당퐁당 넣는 언니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나도 알바 동기들한테 배웠는데 새우살을 사이다에 담궈놨다가 먹으면 맛있대."

사이다에 절여져 한껏 달아진 새우살을 씹으며 감탄하는 나를 한없이 인자한 눈길로 바라보던 언니. 내게는 늘 온화하고 따뜻한, 그야말로 우영우의 최수연, 봄날의 햇살 같던 언니였지만 선을 넘는 사람에겐 가차없이 싸늘해졌다.


공강 시간에 언니와 점심을 먹고 대학가를 거닐다가 노점에서 마음에 드는 벨트를 발견했던 날이었다. 마음에 쏙 드는 벨트였지만, 눈에 띄는 하자가 있었다.

"혹시 진열된 거 말고 새 상품은 없어요?"

"아유, 그게 제일 잘 나가. 마지막으로 한 개 남은 거야."

아직 한낮이었는데 마지막 남은 한 개라는 말이 의아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냥 발길을 떼기엔 너무 내가 찾던 바로 그 벨트였다.

"그럼 조금만 깎아주시면 안돼요?"

"이거 팔아서 얼마나 남는다고 깎아달래? 나 여태 장사하면서 이런 사람 처음 보네!"

"아~이런 사람을 처음 보셨어요? 여기서 장사 얼마나 하셨는데요?"

깜짝 놀라 돌아보니 내가 실랑이를 하는 내내 잠잠하던 언니의 눈이 돌아있었다. 그토록 차가운 언니의 얼굴은 처음 봤다. 내게 보여준 언니의 모습이 다는 아니라는 걸, 그때 어렴풋이 느꼈다.


언니의 포쓰는 동아리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우리는 밴드부에 들어갔고 나는 드럼, 언니는 키보드를 맡았다.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키보드를 치는 언니의 모습은 특별할 것이 없었는데도 남녀노소 불문하고 넋을 잃고 바라보게 만드는 데가 있었다. 연습을 빙자해 껄떡대는 선배들이나 치대는 동기들에게 언니는 늘 예의 바르게 선을 그었다. 능글능글 다가왔던 사람들도 주춤주춤 맴돌다가 결국은 발길을 돌리곤 했다. 아쉬움은 그들의 몫, 사람들의 관심에 언니는 도통 관심이 없어보였다. 어딘가에 귀속되어 머물려 하기보다 주어진 상황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언니가 내 곁에 진득하니 있어주는 게 좋았다.


되도 않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고, 따뜻함을 가득 담아 나를 바라보던 언니. 언니가 했던 말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내 말을 들어주던 언니의 모습은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선연하게 떠올라서 나는 늘 언니가 보고 싶었다. 누구 노래 가사처럼 당장 보지 못하면 눈 멀 것 같고, 활화산처럼 불타오르는 그런 그리움이 아니고 일상에 늘 배어있는 은은한 그리움이었다.


그런 언니를 10여년 만에 돈까스집에서 마주하고 앉았다.

"언니, 난 알리오 올리오 먹을래요."

"그게 맛있어?"

나는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양,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언니에게 속삭였다.

"언니히...여기가하...돈까스 전문점인데헤, 사실흐은 파스타하 맛집이에요호..."

10년 만에 만나도 언니 앞에선 이렇게 금방 다시 어리광이 나온다.


사진출처 : 홍익돈까스


곧 우리 앞에 알리오 올리오 두 접시가 놓였다. 돈까스 전문점에서 알리오 올리오를 각자 앞에 놓은 두 여자가 웃음을 참으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언제나 먼저 입을 떼는 건 어린 여자다.

"언니, 난 이게 좋아요. 내 밥은 내 앞에 놓고 먹는 거요. "

"맞아! 나도 그래! 그래서 회사에서 같이 밥 먹을 때 종종 스트레스 받아."

"똑같은 거 시키려고 하면 나눠먹게 다른 거 시키라고 하는데, 나는 내 몫이 딱 내 앞에 있어야 되거든요. 아니 왜 남의 메뉴까지 정해주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내꺼 내가 다 먹을건데."

끝도 없이 이어지는 나의 투덜거림이 음악소리라도 되는 양 언니는 흐뭇하게 그저 듣는다.


젓가락만 써서 음전하게 먹는 언니와 양손에 포크와 수저를 들고 신명나게 먹는 나. 같은 음식을 먹고 있다고 누가 생각이나 할까. 곧 언니의 접시에는 새우가 한 마리도 없게 되었고, 내 접시에선 파스타면이 흔적을 감췄다. 시시각각 줄어가는 새우와 파스타면이 못내 아쉬웠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야금야금 축내면서 너무 오랜만에 맛보는 별미가 사라져가는 게 슬프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마주 앉아 같은 시간을 음미했다.


헤어질 때가 다가오자 언니는 말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참 힘들더라. 그러면서 너랑 있을 땐 왜 그렇게 편했을까 생각해 봤거든. 넌 나한테 요구하는 게 없었어. 그래서 그랬나 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언니, 우리가 서로를 예뻐했잖아요. 상대가 뭘 요구해도 마냥 좋았겠죠. 요구하는지조차 몰랐을 거예요."

못 보는 10년 동안 세상 풍파로 고단했다던 언니가 그 시절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손을 흔들어 다시 나의 일상에서 종적을 감췄다. 깊고 진한 여운 탓에 마음이 아려오긴 했지만 괜찮았다. 이 정도의 그리움은 언제나 품고 있었으니까. 늘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앞으로도 은은하게 언니를 그리워하겠지.


그 시절 우리는 서로가 마뜩했고, 기꺼이 서로를 들어주었고, 그게 우리의 기쁨이었다. 그때 거기에 선영언니가 있었다. 나의 유일한 선영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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