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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아는 맛 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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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Jul 27. 2021

넉넉한 식혜, 깐깐한 상추

미이고모를 위한 변(辯)

"찡찡대지마."

묵직하게 시작해 나직하게 떨어지는 명령조. 저런 막말을 저런 억양, 저런 어투로 구사하는 사람을 알고 있다. 나도 모르게 몸을 돌려 카운터 쪽을 보았다. 세상에 이럴수가. 정말로 서 있었다. 거기에. 미이고모가.




앞서 <닭죽> 편에서 금이고모의 삶을 고단하게 만드는 불청객으로 잠시 등장했던 미이고모는, 사실 내게는 고마운 어른이다. 열 손가락을 넘어가는 양가의 이모/고모들 중에 내가 태어났을 때 미혼이었던 이는 미이고모와 금이고모 둘 뿐이었다. 내 아버지인 둘째오빠의 원조로 그나마 고등학교까지 다닐 수 있었던 두 고모는 둘째오빠에 대한 보은 차원에서였는지 우리 남매를 퍽 귀여워했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비빌 언덕은 가까이 사는 이모들보다 멀리 서울에 사는 고모들이 되었고, 한번 서울에 올라갔다 하면 가능한 길게 비비적거리다 방학이 끝날 때가 다 되어서야 겨우겨우 집에 돌아오곤 했다.


6학년 여름방학엔 동작구 상도동에 위치한 숙이고모 집에서 보냈다. 아마도 전셋집이었을 그 집에서 숙이고모 부부와 숙이고모의 딸, 금이고모 부부, 미혼의 미이고모까지 총 여섯 식구가 복닥거리며 살고 있었다. 썩 좋은 조합은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상당히 문제가 많은 조합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둘째 숙이고모와 셋째 미이고모의 불화였다. (가뜩이나 날도 더운데 좁은 전셋집에 친정조카까지 와서 치대고 있으니, 나 때문에 더 자주 싸웠는지도 모르겠다.)


그 날 아침도 숙이고모와 미이고모 사이에서는 어떤 여자가 개의 소생인지, 어떤 여자의 정신상태가 더 불안정한지를 가리느라 큰소리가 오갔다. 거기까지는 일상적이었다. 누구도 딱히 심각성을 느끼지 않았고 각자의 일로 분주했다. 여느 때와 같은 아침에 의외성을 불어넣은 건 의외로 사람좋은 고모부였다. 출근 준비를 하던 고모부는 전에 없이 큰 소리로 숙이고모에게 벌컥 역정을 냈다.

"이 사람아! 왜 살아! 동생한테 개ㄴ 소리 들으면서 왜 살아! 왜 동생한테 미친ㄴ 소리를 듣고 사느냐고!"

늘 점잖던 고모부가 석고상같은 얼굴을 깨뜨리며 화를 내자 모든 소음이 일시에 가라앉았다. 음소거 해제 버튼을 누르고 입을 연 건 역시나 참지 않는 미이고모였다.


"형부!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예요?"

"말하면 처제가 듣기나 하고?"

"말을 왜 그렇게 해요? 언니도 똑같이 이년저년 했는데?"

고모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 길로 출근을 했고, 숙이고모도 네 살짜리 딸래미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전의를 상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적군을 상실한 미이고모는 씩씩거리며 내게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탑골공원에 가자는 거였다. 방학숙제로 탑골공원에 가야 한다는 내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날이 더웠다. 모처럼 쉬는 날, 조카의 방학숙제를 위해 헌납하기엔 몹시 더운 날이었다. 탑골공원에 나와앉은 어르신들의 부채도 쉴 새 없이 흔들거렸다.

"고모 나 목말라. 너무 더워."

"찡찡대지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고모는 탑골공원 인근의 전통찻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카페가 흔하지 않던 시절, 인생 최초의 카페방문이었다. 가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음료를 사먹는다는 게 몹시 낯설게 느껴졌다. 어색함에 몸둘 바를 모르는 내게 고모는 식혜와 떡을 시켜주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눈은 왜 메뉴판 가격표를 스캔하는 데 특화되어 있는 것인지.

"히익!"

"왜?"

"고모, 여기 음료 다 3000원이 넘어!"

고모가 피식 웃었다.


곧 소담한 쟁반에 정갈하게 담긴 음료와 떡이 나왔다.

"히익!"

"또 왜?"

"고모, 요거 한 잔에 3500원이야? 난 한 병 다 주는 줄 알았는데..."

이번엔 고모가 요란하게 소리내어 웃었다.


식혜는 시원하고 떡은 달았다. 술술 넘어갔다. 맛있게 먹고 나오면서도 미안한 마음에 공연히 궁시렁거렸다.

"고모, 근데 여기 너무 비싸다. 나는 그냥 슈퍼에서 물 사먹어도 되는데."

"날필아. 우리가 낸 돈에는 저 가게에 앉아서 누린 편안함과 시원함이 다 포함되어 있는거야.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걸 아까워하지마. 좋은 가치를 누리고 싶으면, 제대로 된 거에 제대로 된 값을 내는 법을 배워야 해."

고작 열 두살의 나를 대할 때도 미이고모는 늘 이토록 진지했다. 


저녁은 집 앞 고깃집에서 먹었다. 환기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작고 허름한 식당이었다. 고기 한 점을 집고 상추를 향해 손을 뻗는데 고모가 조용히 쌈바구니를 식탁 밑으로 내려놓았다. 

"고모 왜? 나 상추 먹을건데."
"안 먹는 게 좋겠어."
고모의 말투가 필요 이상으로 단호해서 영문도 모른 채 꾸역꾸역 고기와 밥을 삼켰다.

내가 수저를 내려놓는 걸 보고 고모는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고모는 아까부터 잘 먹지도 않았다. 계산대에서 계산을 마친 뒤, 고모는 식당주인에게만 들리도록 소리를 낮춰 말했다.

"상추에 뭐가 좀 많이 묻어있더라고요. 다음에는 세척할 때 좀 신경써주시면 좋겠어요."

"아이고 미안해요. 미처 몰랐네. 진작 말씀을 하시지!"

웃는 낯으로 세상 껄끄러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대신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식당 밖으로 나와 고모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그런 말은 뭐하러 해? 이미 다 먹었는데."
"말해야지. 너 상추 먹고 싶었는데 못 먹었잖아."

"그럼 아까 먹고 있을 때 상추 새로 달라고 얘기하든가."

"똑같은 식당에서 씻은건데 다른 상추라고 깨끗하겠어? 그냥 담부턴 신경써달라는 거지."

"그냥 담부터 안 가면 되지. 뭐하러 서로 기분 나쁘게 그런 말을 해?"

"아니지. 니가 식당주인이라고 생각해봐. 암말 안 하고 다신 안 오는 손님이 낫겠어, 불만을 말하고 다시 찾아주는 손님이 낫겠어. 불편한 건 얘기하고, 얘기해도 안 바뀌면 그때 안 가면 돼."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하는 고모, 나는 고모를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참 이상한 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날의 기억이 선연해졌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날 고모의 말을 떠올릴 일이 자꾸만 생겼다. 본전 생각에 값싼 비지떡을 선택하고 후회할 때, 부당한 상황에서 정당한 나의 권리를 요구할 때마다 나는 시원한 식혜와 덜 씻은 상추, 그것들을 대하던 고모의 태도를 생각했다.


그날 미이고모는 내게 두 개의 상반된 가르침, 아니 사실은 긴밀하게 연관된 두 개의 가르침을 주었다.

첫째, 좋은 가치를 누리고 싶다면 충분한 대가를 지불할 것.

둘째, 대가를 지불하고 누리는 가치가 기준에 미치지 않을 땐 당당히 얘기할 것.

고모의 가르침은 뒤늦게 소화되어 나의 피와 살이 되었다. 


사실 친가식구들 사이에서 고모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 누군가는 고모를 두고 씀씀이가 헤프다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쓸데없이 꼬장꼬장하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날 내 눈에 비친 고모는 가치에 합당한 가격을 기꺼이 지불하면서도 불합리한 대우에 제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어른이었다. 한 사람의 똑같은 면모는 상황에 따라 장점이 되기도, 단점이 되기도 하며 그렇기에 세상엔 좋기만 한 사람도 나쁘기만 한 사람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 그 또한 고모가 내게 남긴 교훈이다.




"미이고모. 고모 맞아?"

군데군데 흰머리가 섞인 노파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럽게 나를 보았다. 도넛 가게에서 십여년 만에 조카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리라.

"나야, 고모. 날필이야."

그제야 고모의 눈에 놀라움과 반가움이 떠올랐다. 

못본 사이 놀라우리만치 변해버린 고모와 마주앉아 어색함을 감추려 짐짓 밝은 목소리로 옛이야기를 꺼냈다.

"찡찡대지마, 이 소리 듣자마자 바로 고모인 줄 알았다니까? 고모 예전에도 그랬잖아. 내가 목마르고 다리 아프다고 하니까 다 큰 게 찡찡대지 말라고, 완전 똑같은 말투로 으하하."

여태 미이고모에게 당해온 게 있어 그런지 옆에서 까르륵 넘어가는 사촌동생과 달리 고모는 웃지 않았다.

"내가 그랬냐. 내가 왜 그랬을까. 날필아, 많이 힘들지, 좀만 참아보자, 그랬으면 좋았을텐데."

웃자고 한 소린데 그만 머쓱해졌다.


머잖아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어나 처음 보는 고모할머니가 사 준 캐릭터 칫솔을 들고 잔뜩 신이 난 내 아이들과 함께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한동안 욕실벽에 걸린 칫솔을 볼 때마다 고모가 떠올랐다. 고모가 내게 준 좋은 것들이 하고 많은데, 왜 하필 매몰찬 말 한마디를 기억해서 고모 앞에 꺼내놓았을까. 다음에 또 고모를 만난다면 그땐 꼭 식혜와 상추 이야기를 해야지.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단언할 순 없다.

그냥 우리 고모였다.

한때 많이 고마웠다.





표지이미지 : 스페셜 K님 블로그

본문이미지 : 마이코리안키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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