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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아는 맛 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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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Oct 21. 2021

옹심이 아니고 용심의 칼국수

용심 : 남을 시기하는 심술궂은 마음

"매실청 어딨어? 갖다가 하수구에 부어버릴라니까!"

급기야 성질이 불 같은 미이고모가 눈을 치켜뜨며 언성을 높이자 할머니는 입을 다물고 돌아앉았다.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내가 잘못한 것만 같은 이 기분은 뭘까.

차라리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좋았으련만.




재수 끝에 대학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하자 금이고모는 반색하며 '밥 먹으러 오라'고 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어정쩡한 대학 들어갈 바엔 너처럼 실속있는 학과 가는 게 훨씬 낫다'며 어거지로 나를 치켜세우는 미이고모의 목소리도 들렸다. 서울에서도 노량진과 용산밖에 모르는 얼뜨기였던 나는 경기도 외곽의 고모집까지 찾아갈 길이 막막했지만, 고모가 일러준대로 전철과 광역버스를 갈아탄 끝에 무사히 고모의 동네에 도착했다.


이미 중학교 2학년 때 한달이나 지낸 바 있는 고모의 동네는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처음 보는 상가들을 지나 여전히 거기 있는 고모의 아파트를 향해 걸었다. 신발을 채 벗기도 전에 고모의 딸들이 내게 매달렸다. 낯가림이라고는 없는 아이들이었다. 누가누가 잔망스럽나 내기라도 하듯 두 아이가 내 곁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잔망의 바다에서 정신을 못 차리던 내게 고모는 고기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나는 고기 먹기 싫다."

여태 잠잠히 계시던 고모의 엄마, 나의 친할머니께서 불쑥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엄마, 왜? 엄마 고기 좋아하잖아. 우리 날필이가 고기 얼마나 좋아하는데."

"나는, 이가 아파서 고기 못 먹는다. 난 칼국수 먹고 싶다."

무언가 화가 난 사람처럼, 할머니는 고집스러웠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건 아마 고모에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엄마, 왜 그래?"

당황한 고모와 단호한 할머니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던 내가 얼른 말했다.

"고모, 칼국수 먹자. 나 칼국수 좋아해."


"우리 날필이 대학 간다고 고생해서...고모가 고기 사주고 싶었는데..."

고모는 못내 아쉬워하며 내 앞으로 고기만두 접시를 밀어놓았다.

"아니야, 나도 점심때부터 고기 구워먹는 거 별로야."

아침부터 삼겹살을 구워먹는 집에서 자란 나는 말도 안 되는 말로 할머니와 고모 사이의 냉기를 데워보려 애썼다. 사실 시종일관 싸늘한 건 할머니였고, 고모는 그런 할머니의 의중을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좌불안석에서 밥을 먹었기 때문일까. 속이 좋지 않았다.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고모, 나 속이 좀 안 좋아."

"에구 체했구나. 엄마, 매실청 어딨지? 접때 엄마가 담가놓은 거 있잖아."

"얼마 안 남았응께 슈퍼에서 초록매실 사다먹으라고 해. 아깝다."

"엄마, 엄마 진짜 왜 그래?"

금이고모가 실소 끝에 한숨을 내쉬었다.

"매실청 어딨어? 갖다가 하수구에 부어버릴라니까! 엄마 한번만 더 그런 소리 했다간 봐."

급기야 성질이 불 같은 미이고모까지 눈을 치켜뜨며 언성을 높이자 할머니는 입을 다물고 돌아앉았다.


할머니는 내게 화가 나 계신 게 분명했다. 어색하게 시계를 보는 척 하며 주섬주섬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혹시 몰라 챙겨온 양말과 속옷이 무색하게 밖은 아직 훤한 대낮이었지만, 자고 가긴 글렀다. 내가 가야만 할머니는 노여움을 푸실 것이다.

"할머니, 저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

내가 집을 나설 때까지도 할머니는 묵묵부답이었다. 고모는 괜히 자기가 더 미안해하며 나를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 주었다. 집에 들어가서 할머니와 싸우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지만 잠자코 버스에 올라 손을 흔들었다.


할머니는 왜 내게 화가 나셨던 걸까. 이유는 모른다. 그때도 모르고, 지금도 모른다. 내가 아는 건 할머니는 그때 이미 많이 늙어계셨고, 그때로부터 3년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는 사실뿐이다. 아마 할머니도 그날 당신이 왜 화가 났는지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젊디젊은 나도 때때로 감정을 주체 못 하고 와락 쏟아버릴 때가 있는데, 늙은 육신 안에 갇혀 운신도 자유롭지 못한 할머니는 오죽했을까.


그나마 딸네 집에서 딸들의 보살핌과 손녀들의 응석을 받으며, 줄어드는 하루하루를 위로받았을 할머니였다. 어느 날 불쑥 나타나 식구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다 큰 손녀가 달가웠을 리 없다. 단 하루라고 해도, 할머니에겐 얼마 남지 않은 날 중의 하루였을 테니까. 정말로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불효막심하게도 나는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보내드리는 자리에 가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할머니는 잘 계실까, 종종 할머니 생각이 날 때마다 그날 먹은 칼국수가 함께 떠올랐다. 할머니가 직접 꼬아 만들어주신 타래과, 세상에 다시 없을 식혜같은 것들은 증발해버리고, 하필 서글프기 짝이 없는 칼국수가, 이미 불대로 불어버린 기억이, 자꾸만 줄줄줄줄 끌려나왔다. 그러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떠오르면 낙담이 됐다. 나를 미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태어나 처음 봤던 할머니의 모습이, 내게 남은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라니.


육신의 한계를 이기지못해 손녀딸에게 적개심을 드러냈지만, 필시 할머니는 나를 보내고 후회했을 것이다. 할머니는 그렇게 모진 사람이 못된다. 병든 남편과 여섯 자식을 건사하는 일이 힘들어 천성보다 딱딱해졌을지언정 태생이 야멸찬 사람은 아니었다. 나를 냉대해놓고, 할머니야말로 가슴이 추워 끙끙 앓았을 게 틀림없다. 내내 할머니를 안쓰러워했으니까, 나는 안다. 세상엔 서로를 그렇게 애틋해하면서 막상 속마음은 터놓고 말하지 못하는 수많은 관계가 있다. 돌아가신 후로는 꿈에서도 만나지 못한 할머니, 마침내 육신을 놓고 훨훨 날아간 할머니가 내게 대한 미안함도 모두 놓고 가셨기를 바란다.


할머니.

나는 괜찮아요.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라서 좋은 날이 더 많았어요.

늘 내가 할머니보다 한참 더 어렸어서, 먼저 안아주지 못해서, 다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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