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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아는 맛 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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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Sep 21. 2022

갈비가 곁에 있어서
나는 그대가 그립다

'아버지다움'이란 무엇인가.

돼지갈비에 얽힌 가족사를 풀어놓으려면 먼저 내 아버지의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다혈질. 막말. 단순함. 투머치토커. 자아도취.

아버지를 수식하는 많은 단어들을 관통하는 핵심키워드는 단연 '아이다움'일 것이다. 좋게 말하면 천진난만, 나쁘게 말하면 유치찬란. 어린 아이와 위화감 없이 어우러지는 천진함도, 수가 틀리면 그 어린 아이를 상대로 전력을 다해 싸우는 유치함도, 모두 아버지의 것이다. 특히, 먹을 것 앞에서는 자식도 돌아보지 않는 '식탐'은 그야말로 '아이다움'의 정점을 보여준다.




"누가 혼자 과자 먹었냐."

쓰레기통에서 과자봉지가 보이면 아빠는 꼭 물었다. 누가, 나만 빼고, 과자를 먹었냐는 것이다. 아빠의 심문은 '단독 과자섭취자'를 색출해낼 때까지 멈추는 법이 없었다. 쓰면서도 넌더리가 난다. 누가 과자 먹었냐니. 누가 좀 먹었으면 어때서. 우린 아빠 없는 데서 과자도 못 먹나? 


1년에 한두 번 돌아오는 소풍이나 다과회 전날밤엔 가방을 사수하느라 바빴다. 사다놓은 과자 중 제일 맛없는 과자 하나만 달라고 조르는 건 초등학교 시절 내내 아빠의 레파토리였다. 하나만 내놓으면 세 개를 사주겠다는 둥, 아빠가 고작 천 원짜리 과자만도 못하냐는 둥, 꼭 과자가 먹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고 네가 주나 안 주나 보려고 그러는 거라는 둥, 말이 길었지만 우린 다 알았다. 아빠는 지금 당장 과자가 먹고 싶을 뿐이고, 줄 때까지 사람을 볶아댈 것이며, 하나를 내어주는 순간 소풍가방은 텅 비어버릴 거라는 사실을. 뒤늦게 돈 만 원을 던져준들 묵직한 소풍가방을 머리맡에 놓고 자는 기쁨은 사라져버리고 말 거라는 사실을.


과자에 대한 집착은 그나마 가벼운 편에 속했다. 우리집은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삼겹살을 구웠다. 아무리 밥을 잘 차려줘도 아빠에겐 고기 게이지가 따로 있었고, 이 고기 게이지가 떨어지면 이내 '고기 허기'를 호소했기 때문이다.

"택이 엄마. 내가 오늘 짐을 싣는데 손이 떨리더라고. 아무래도 요즘 고기를 못 먹어서 그런 거 같은디."

이때 아버지가 말하는 고기란 육고기, 그중에서도 '불판에 구운 육고기'를 뜻한다. 국에 빠진 고기, 삶거나 조린 고기, 양념해서 볶은 고기는 해당사항이 없다. 먹어도 먹은 게 아닌 것이다.


"아이 뭔 소리요. 사흘 전에 먹은 건 고기가 아니고 고무요? 무슨 돼지랑 원수졌소?"

어이가 없어서 혀를 끌끌 차면서도 엄마는 익숙한 동작으로 냉동실에서 삼겹살을 꺼내놓곤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사흘에 한 번씩 먹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삼겹살은 맛있었다. 날도 군침을 삼키며 잘 익은 삼겹살 한 점을 집어드는데 아빠가 벌컥 화를 냈다.

"아아니, 쟈는 어째서 내가 집어갈라고 한 고기만 쏙쏙 골라서 집어간다냐!"


어안이 벙벙했다. 아빠가 찜해둔 고기는 익으면서 표면에 <아.빠.고.기.>라고 각인이라도 되는 것인지. 당신이 찜한 고기를 내가 어떻게 알고 쏙쏙 골라서 집어간다는 말인지. 그저 비계와 살코기의 비율, 구워진 정도를 보고 골랐을 뿐인데 공교롭게도 아빠와 나의 취향이 정확하게 일치했던 것이다. 아빠는 그게 못마땅했던 것이고. 물론, 못마땅할 수 있다. 같은 고기를 탐하는 자들끼리는 그 못마땅함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못마땅함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너무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없어보이는' 아버지의 일화는 차고 넘친다. 3학년 어린이날, 처음으로 배달피자를 먹어본 날이었다. 그나마도 엄마의 고객이 피자집 사장님이라, 고객관리 차원에서 어렵게 한 판 시켜준 것이다. 처음 보는 음식 앞에서 나와 오빠, 아빠는 몹시 흥분했다. 아빠 세 조각, 오빠 두 조각, 나 두 조각, 엄마에게는 겨우 한 조각이 돌아갔다. 순식간에 당신 몫을 해치운 아빠는 입맛을 다시며 오빠와 나의 피자를 넘봤다. 엄마는 말없이 가위를 들어 오빠의 몫에서 반 조각, 내 몫에서 반 조각을 잘라 아빠의 빈 접시를 다시 채워주었다.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반색하며 피자를 집어드는 아빠를 보면서, 처음으로 아빠가 좀 '아빠답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아빠는 왜 이럴까.

먹을 것 앞에서는 자식도 경쟁자로 여기는 아빠.

경쟁자로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식들을 제치고 숱하게 우승을 차지하는 아빠.

어쩔 수 없잖은가. 아빠를 내가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아빠답지 않은 아빠라도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체념하고 받아들였던 아빠의 '아빠답지 못함'이 새삼 징글징글해진 건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엄마가 보름 동안 미국에 갔을 때다. 아빠는 서툰 요리실력으로 나름 고군분투했지만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우리는 세 번에 한 번 꼴로 외식을 했는데, 그중 돼지갈비는 아직 엄마가 돌아올 날이 한참 멀었던 어느 주말의 저녁메뉴였다. 갈비와 사람이 함께 구워지는 따땃한 온돌방에서 아빠를 마주보고 나란히 앉은 우리 남매는 고기가 익는다 싶으면 지체없이 젓가락을 뻗었다.



"아빠, 이거 먹어도 돼?"

"아빠, 이거 다 익었어?"

딱히 아빠의 대답을 기다린 건 아니다. 우리는 질문을 던지며 입을 벌렸다가 고기를 쑤셔넣으며 입을 다물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달착지근한 양념을 머금어 노릇하게 구워진 돼지갈비 맛은 기가 막혔다.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라는 구호가 있기도 전부터 고기 앞에선 늘 하이텐션이었던 아빠. 그런 아빠의 얼굴이 시시각각 어두워져 가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우리는 불판의 고기만 노려보고 또 노려봤다.


마침내 엄마가 돌아와 처음으로 고기를 구워 먹던 날, 아빠는 감상에 젖어 입을 열었다.

"어이, 택이 엄마. 나가 말이여, 애들만 데리고 고기 먹으러 갔다가 완전히 욕 봐브렀네(고생을 했네). 굽기만 굽다가 이제 좀 먹어볼까 싶으면 없고. 또 한참 굽다가 보면 없고. 나 먹을 고기 챙겨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란 말이네."

정확하게는 '굽기만'이 아니고 '굽기마아아아안'이라고 했다. 이 대목에서 아빠의 서러움이 극대화되었다. 돼지갈비집에서 아내의 빈자리를 사무치게 느꼈다는 고백을 아빠는 무지 감동적인 얘기처럼 했다. 생각해보니 목이 좀 메었던 것도, 눈꼬리에 물기가 어렸던 것도 같다. 아, 그러니까 아빠만.


엄마의 입장은 어땠을까? 고작 돼지갈비 구워줄 사람이 없어서 내 빈자리를 느꼈다는 말을 들으면 글쎄, 나는 정확하게 남편의 갈비를 향해 주먹을 뻗고 싶어질 것 같은데.

"아이고, 그랬소. 그때 못 먹은 것까지 오늘 많이 드씨요."

지금 생각하면 엄마는 우리 뿐 아니라 아빠도, 상당 부분 키우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엄마의 반응은 버릇처럼 찡얼거리는 아이를 어르듯, 무덤덤하고 선선했다.




다혈질. 막말. 단순함. 투머치토커. 자아도취. 운동광.

40대 중반 즈음, 아버지의 수식어 목록에 새로운 단어 하나가 추가되었다. '지역 마라톤 대회' 참가를 계기로 아버지는 갑자기 운동 바람이 났다. 마라톤, 자전거, 수영, 종목을 하나씩 더해가더니 급기야는 철인 3종 경기에 출전하고, 50대 후반엔 같은 연령대에서 우승/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일반인인 우리의 시선으로 볼 때, 운동에 대한 아버지의 열정은 정말이지 광적이었다. 문제는 본인의 열정을 자꾸 남들에게도 강요해서 사람들의 반발을 산다는 것이었다.


살 찐 사람이나 어설프게 운동하는 사람을 아버지는 그냥 보아 넘기는 법이 없었고, 꼭 입을 대서 상대방을 황당하게 했다. 심지어 평생을 체중미달과 평균을 오가며 살아온 자신의 사위, 그러니까 내 남편에게도 청하지 않은 '다이어트 개론'을 설파하곤 했다.

"살이라는 게 말이여, 다 지방이거든. 이 지방을 태울라면 무조건 운동을 해야 돼. 근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설프게 운동하고 입맛만 좋아져서 더 많이 먹어버린다고. 이런 운동은 안 하느니만 못해. 운동을 제대로 하고 나면 오히려 입맛이 떨어져. 아 그래도 먹기는 먹어야제. 운동을 해야 되니까. 근데 운동을 제대로 하는 사람들은 딱 적정량만 먹는다고, 나처럼."

"아, 그렇습니까. 와, 정말 대단하십니다."

끊임없이 감탄사를 연발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남편의 모습은 마치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놓인 노호혼 같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이 히죽거렸다.

"왜 혼자 웃어?"

"장인 어른이 식사할 때 제일 많이 하시는 말씀이 뭔지 알아?"

"뭔데?"

"나는 조금만 먹을 거여, 조금만."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젖히고 웃음을 터뜨렸다. 남편은 다 알았던 것이다아버지의 일장연설이 일종의 자기암시라는 것을. 버릇처럼 되뇌는 '절식'의 메시지는 곧 많이 먹고 싶은 소망의 발로가 아닐까.

"나는 (사실 많이 먹고 싶지만, 살찌는 것도 싫고 절제하는 스포츠맨으로 보이고 싶으니까) 조금만 먹을 거여, 조금만."


운동광 아버지는 손자에게 건네는 칭찬들도 하나같이 남다르다.

"달리기에 안성맞춤인 발", "자전거에 특화된 다리" "수영선수처럼 딱 벌어진 어깨"

정말이지 남다르게 자기중심적이다. 그나마도 세상에서 처음으로 만난 '자식의 자식'에게나 허락된 칭찬세례다. 자아도취 아버지가 자신 외에 누군가를 전폭적으로 인정하고 추켜세우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니까. 이토록 귀애하는 손자 앞에서도 아버지의 식탐은 가끔 고개를 처든다.


"할아버지 쪼코파이, 누가 먹었습니까아?"

30년 전에 비해 말투만 부드러워졌을 뿐, 질문의 의도는 똑같다. 운동할 때 먹으려고 사다놓은 초코파이를, 누가, 할아버지 없을 때, 먹었느냐는 것이다. 손자가 좀 먹으면 어때서. 누가 먹었는지를 밝혀서 대관절 어디에 쓴단 말인가.


"아이고, 하라야. 그 옥수수가 제일 맛있는 건디, 할아버지 반만 나눠주면 안되겄습니까아?"

손자가 먼저 집어든 까만 찰옥수수를 못내 아쉬운 눈길로 좇다가 끝내 포기하지 못하고 결국 말을 꺼내고야 마는 아버지는 확실히 다른 할아버지들과는 다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다른' 할아버지니까 다를 수밖에. 할아버지다운 할아버지. 아빠다운 아빠. 그런 건 누가 정했을까. 국제표준 아버지/할아버지 규격이라도 있나. 나의 아버지는, 내 아이들의 할아버지는, 이런 사람이다. 실로 우리 아버지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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