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엄마일기

"내가 니를 참 아낀다"

by 날필


언젠가 모임자리에서 "저는 남편에게 불만이 하나도 없어요."라는 다소 재수없는 발언을 뱉은 적이 있다. 해당발언에 대한 추가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렇다. 나는 남편에게 불만이 없다. <불만이 없다>는 것은 이 사람을 이루고 있는 많은 요소들에 대한 나의 평가다. 즉 그의 식성, 생활습관, 사고방식, 더 세세하게 적어보자면 교육관, 정치성향, 삶의 지향점 등이 나와 충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사람과 살 수 없다>고 평할 만큼의 치명적인 결함, 어쩌면 그 사람의 결함일 수도 있고 나의 모남(흔히 히스테리라고 한다)일 수도 있는 그 지점의 충돌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것을 <우리는 전혀 싸우지 않아요, 제 남편은 완벽하거든요>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퍽 난감하다. 가장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꽤 많은 시간을 서로에게 할애하는 관계에서 마찰이 아예 없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싸움은 늘 사소하게 시작된다.

이 싸움에서 각자에게 내재된 생활습관, 사고방식, 가치관 등이 여실히 드러나는데 그것 자체가 싸움거리가 된다기보다는 그것이 싸움을 키우거나 혹은 중재한다. 다시 말하지만 싸움의 원인은 늘 사소하다. 싸움을 키우거나 중재하는 건 싸움을 다루는 각자의 방식과 싸움에 임하는 각자의 태도다.

가끔 인간으로서의 덕목을 다 내려놓고 싸우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하고 싸우면 멀쩡한 사람도 덩달아 개싸움을 하게 된다. 싸우는 것도 인간관계의 연장선이다. 싸우더라도 평소처럼 인간사회의 룰은 다 지키면서 싸워야 한다는 소리다.


우리는 개싸움을 하지 않는다.


욕설은 쓰지 않는다.
무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이웃에 들릴 정도로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이 정도만 지켜도 개싸움까지 가지 않는다. <사람싸움>으로 그친다.


그럼 싸울 땐 그렇다치고. 싸우지만 않으면 부부생활 끝나냐? 싸우던 것도 옛날얘기지, 요즘은 싸울 의욕이 없다. 싸움거리는 늘상 생겨나지만 전투력이 없다. 넘어간다. 웃어넘기기까진 못해도 어쨌든 넘어간다. 싸우기 귀찮으니까. 그렇게 넘어가다가 넘어가다가 그러다 피식 웃게 만드는 기억들이 있다.





아직 둘째가 무지하게 울어댈 때의 이야기다. 첫째는 네다섯살, 둘째는 두세살 즈음. 남편이 늦게 오는 날은
아이들 먹이고 씻기고, 일찌감치 재워놓고 설거지 해야지. 집도 좀 치워놔야지. 마음을 먹고 아이들을 재우러 들어간다. 그리고 눈을 떠보면 꼭 새벽이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남편도 들어와 자고 있다.

아...내 팔자야....첫째식판이라도 씻어둬야지, 끄응- 일어나 나가보면 부엌이 말끔하다. 식탁도 싱크대도 다 치워져있다.

아침에 일어나 남편에게 물었다.
"짱이아빠, 어제 몇시에 왔어?"
"열두신가 한신가"
"근데 설거지를 해놓고 잤어? 몇시에 잤어?"
"두시 좀 넘어서"
"아이고...그냥 내가 아침에 하게 놔두지..."

너무 미안해서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있는데 남편의 웃음섞인 한마디.

내가 니를 참 아낀다.


이 말에는 참 많은 뜻이 담겨있었을 거다. 그 뜻을 풀어쓰면 다소 구질구질해지므로 굳이 풀어쓰지 않겠다. 쿨하려고 노력했던 남편의 뜻을 존중해 쿨하게 남겨두겠다. 아무튼 나는 그 말을, 다음부터 잘하라는 말로 받아들였다. 그 말을 그렇게 해줘서 고마웠다.




2년도 더 전의 이야기다. 요즘은 택도 없는 이야기다. 그래도 가끔. 내 마음에 관대함이 부족할 때. 상대방의 관대함도 전같지 않다 느낄 때. 서로에게 관대했던 날의 기억으로 오늘 좀 인색했던 관대함을 쥐어짜 상대에게 베풀어본다.


"내가 니를 참 아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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