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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Jun 22. 2020

인생의 뒤안길, 전복죽 한그릇

김수현 씨에게 집밥은 무엇이었을까

그녀의 이름은 김수현. 아들만 줄줄이 다섯이던 부잣집에 막내딸로 태어나 온 식구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1920년대생 여자이름치고는 상당히 정제된 이름 석 자만으로도 그녀가 집에서 얼마나 귀애받는 자식이었던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루는 그네를 타다가 떨어졌는데 그네에서 떨어지면 명줄이 짧아진다는 미신에 애가 닳았던 그녀의 부모는 '난봉꾼에게 시집을 가면 액운을 피한다'는 점쟁이 말을 믿고 금지옥엽 아까운 딸을 그만 동리의 별볼일 없는 한량에게 주어버렸다. 그러니까 단명이라는 액운을 피하기 위해 김수현 씨는 평생에 드리워질 '남편'이라는 액운을 떠안은 것이다.


과연 동리 제일의 난봉꾼이었던 남자를 만나 김수현 씨의 인생은 상당히 고달파졌다. 내리 딸만 다섯을 낳은 그녀를 대놓고 못마땅해하던 남자는 당당하게 두 집 살림을 차려 아들까지 봤고, 이꼴저꼴 다 보고서야 김수현 씨는 딸 다섯을 데리고 집을 나왔다. 쟁그라운 집구석 다신 마주칠 일도 없게, 그녀는 그녀가 아는 가장 크고 먼 곳으로 향했다. 평생을 촌구석에서만 살던 그녀는 그 크고 휘황한 도시에서, 좁디 좁은 방 한칸을 잡고, 딸 다섯을 낳은 이래 처음으로 두 발을 쭉 뻗고 잠을 잤다. 김수현 씨와 다섯 딸들, 이 여섯 여자의 삶은 필히 고단했을 것이라고, 후세대의 우리는 단정짓기 쉽다. 그러나 오늘날 김수현 씨의 다섯 딸들이 모여 앉아 김수현 씨를 회고할 때, '엄마가 먹는 것만큼은 정성을 들여서 잘해먹였다'라는 말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롭다.


무와 소고기만 들어간 탕국이라든지, 돼지고기를 숭덩숭덩 썰어넣고 끓인 김치찌개라든지, 특히 유장을 발라가며 연탄불에 구워낸 고등어구이에 대한 묘사는 얼마나 많이 들었던지 먹지 않았는데도 그 맛을 알 것만 같다. 생선조림, 생선구이 등 생선요리에 대한 기억이 유독 진하게 남은 건 십리 밖을 간다는 그 냄새도 냄새려니와 한정된 예산으로 양질의 단백질을 먹이고 싶었던 김수현 씨의 마음이 뒤늦게 읽혀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김수현 씨의 음식을 곱씹다보면 딸들의 화두는 자연스럽게 '우리가 하면 그 맛이 안 난다'는 아쉬움으로 번졌고 '모르긴 몰라도 엄마가 미원을 좀 썼을 것이다.'는 음모론으로 왁자그르르하게 마무리 지어지곤 했다.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김수현 씨의 다섯 딸들은 계속해서 뭔가를 입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쉴새없이 입에서 나오는 말과 끊임없이 입으로 들어가는 주전부리. 그건 마치, 등가교환의 현장같았다.


이렇게나 먹성 좋은 딸 다섯을, 시집가기 전까지 온실 속 화초로만 살았던 김수현 씨가 어떻게 그리도 살뜰하게 거둬먹였을까? 여자 혼자 몸으로 대도시에서 생활을 영위하며 자식 다섯을 부족함 없이 해먹이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딸들의 회고와는 달리 그녀에게 집밥은 천형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하루 세번 꼬박꼬박 돌아오는 끼니 때와 그때마다 상 앞에 둘러앉은 다섯 개의 입은 얼마나 잔인한가. 보통날이야 자식 입에 넣어줄 생각을 하며 신나게 음식을 해댔겠지만 일년 중 한두번은 밥을 하는 손끝에 짜증과 피로가 달라붙는 그런 날도 분명 있었을 터다. 그녀에게 집밥은 과연 따뜻하고 그립기만 한 기억일까? 이런 추론이 아주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듯 김수현 씨의 외손자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외할머니는 <너*리>가 좋다고 하셨어. 외할머니는 <너*리>가 좋다고 하셨어.


외할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은 <너*리>라면이었다고 기억하는 김수현 씨의 외손자, 완이. 완이가 태어나던 날부터 김수현 씨는 완이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완이의 모든 것에 열광하고 환호하는 제 1호 팬. 늘 바쁜 완이의 엄마를 대신해 김수현씨가 완이를 키웠다. 백일 즈음 머리를 세게 부딪친 뒤 사흘을 내리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만 자던 완이의 입에 쌀미음을 흘려넣어 완이를 살려낸 일은 두고두고 그녀의 공로로 회자되었다. 그러니까 완이의 몸 속으로 흘러들어간 최초의 곡기도 김수현 씨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완이의 기억이 시작된 시점부터 '첫 맛'에 대한 대부분의 기억은 김수현 씨와 맞닿아있었다. 완이는 철이 들 때까지 갈치는 네모낳고 창자가 없는 물고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수현 씨가 완이에게 내놓는 갈치는 언제나 네모낳고 큼지막한 갈치의 중간 도막. 창자도 없고 꼬리도 없는 가장 좋은 부위였기 때문이다.


완이가 좀 커서 손이 많이 가지 않게 되자 김수현 씨는 근처의 의사집에 식모를 살러 갔다. 음식솜씨가 좋았던 고로 여러 집에서 그녀를 모셔가고 싶어했다.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해주는 동안에도 김수현 씨는 주일마다 교회에서 완이를 만나면 한 뭉텅이의 김을 쥐어주었다. 완이는 입이 짧았지만 김수현 씨가 구워준 김만 있으면 밥 한 공기를 거뜬히 비워냈다. 종이도 귀하던 시절, 식모 살던 집에서 얻은 종이에 구운 김을 싸서 외손자가 기다릴 새라 서둘러 교회로 향했을 김수현 씨.

김수현 씨(왼)와 김수현 씨의 사위(오른), 외손자 완이(아래). 사진 속에서 김수현 씨는 대부분 부동자세다.

구운 김과 갈치 중간도막을 먹여 기른 완이가 어른이 되어 더 큰 도시로 가게 됐을 때, 세월 앞에 달라져 있는 건 완이 뿐만이 아니었다. 김수현 씨는 전과 같지 않았다. 기력과 바지런함은 그대로인데 자꾸만 풀어지는 정신이 무수히 많은 그녀의 장점들을 쓸모없는 것으로 보이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필요로 하게 했던 그녀의 음식솜씨마저도.


기억과 함께 장점을 하나씩 잃어가던 김수현 씨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딸들에겐 모두 가정이 있거나 사정이 있었다. 그 중 가장 억척스럽고 사람도리를 중시하는 그녀의 둘째딸, 완이의 엄마만이 마지못해 그녀를 집으로 모셔왔다. 가끔 완이가 집에 내려오면 김수현 씨는 완이를 이리저리 피해다녔다.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손자가 왔다, 엄마, 김수현, 김수현 엄마, 엄마 손자 알아? 누군지 알아?" 둘째딸이 아무리 물어도 그녀는 손자 앞에서 공손하게 손을 모은 채 손자의 시선을 피해 불안하게 눈을 돌릴 뿐이었다.


더 이상 집에서 돌볼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악화된 김수현 씨는 요양원으로 보내졌다. 명절이나 생일, 계절이 바뀔 적에 김수현 씨의 다섯 딸들이 번갈아가며 요양원으로 찾아오곤 했다. 완이가 장가를 가던 해, 완이의 엄마는 완이와 완이의 아내에게 김수현 씨가 있는 요양원에 함께 갈 것을 조심스럽게 청했다. 요양원에 가기로 한 전날 밤, 완이의 엄마는 전복죽을 끓였다.

"내가 항상 전복을 많이 넣고 살(쌀)을 적게 넣는다고 하는데도 끓여놓고 보면 이래 묽어져뿌린다. 전복알갱이가 하나또 없다. 근데 또 너무 뻑뻑하면 할머니가 드시기 안 좋다. 할머니가 이제 나도 못 알아본다. 아무도 모리고. 사람이 껍데기만 남아서. 뭐를 잘 묵도 안 하고. 전복죽이나 쒀가면 그래도 좀 잡수신다. 그러이 이기, 전복이 참 맛있는 긴기라. 고마 다 이자뿌린 것 같애도 용하게 맛을 안데이."

죽을 끓이는 내내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묻지도 않은 말을 하면서.


요양원 면회실로 김수현 씨가 들어왔다. 아흔을 넘긴 그녀는 놀라우리만치 고른 치아와 강단있는 얼굴형이 치매환자같지 않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게 다 할머니 이다. 하나도 해넣은 이가 없고 다 본래 자기 치아인기라."

김수현 씨의 둘째딸이 자식자랑하듯 엄마의 건치를 자랑하더니 김수현 씨의 양 볼을 감싸며 그녀와 눈을 맞추려 애썼다.

"김수현. 김수현. 엄마. 잘 있었어? 엄마, 손자가 왔다. 엄마 손자가 장가갔다."

"와 이카노. 와 이카노."

손자는 물론이고 딸도 알아보지 못하고 연신 고개를 숙이던 김수현 씨는 한참을 그러고 있다 문득, 고개도 들지 않은 채로 희미하게 말소리를 냈다.

"니 새끼가."

"맞다 그래. 내 새끼다."

"며느리가."

"그래! 엄마 맞다! 며느리다. 아이고 엄마. 맞다 며느리다!"

기쁨과 놀라움으로 딸의 목소리가 한껏 높아졌을 때, 김수현 씨가 완이의 아내에게로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에게 손을 내어준 완이의 아내는 극심한 통증에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고르고 하얀 이, 아흔이 되도록 하나도 해넣지 않은 본인의 건치로 김수현 씨는 외손자며느리의 오른손을 있는 힘껏 깨물고 있었다. 모두가 놀라서 완이의 아내를 김수현 씨에게서 서둘러 떼어놓았지만 이미 내 눈에서는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맞다. 김수현 씨의 둘째딸, 그 아들 완이의 아내가 바로 나다. 시외할머니에게 손을 물리고 울고 있는 스물다섯살짜리 새색시. 벌써 십여년 전의 일이다.


당시엔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워 눈물을 쏟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이 망아지같은 외손자며느리가 앞으로 자신의 딸(나의 시어머니)을 무던히도 힘들게 할 거라는 걸 미리 직감하셨던, 시외할머니의 경고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어 웃음이 나온다. "내 딸 힘들게 하지 말라"는 경고의 바이팅. 정말 그런 거였다면 그때 물린 오른손 말고 왼손도 마저 내어드릴 것을. 실제로 나는 결혼 10년차인 오늘날까지도 김수현 씨의 둘째딸을 여러 번 뒷목잡게 하는 요주의인물이다.


그 날 요양원에서 김수현 씨가 씹은 것이 외손자며느리의 오른손만은 아니었다. 외손자며느리의 오른손으로 식욕을 돋운 그녀는 뒤이어 딸이 떠먹여주는 전복죽을 한 술 한술,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그렇게 천천히 한 그릇을 다 비웠다. 평생을 자기 입에 좋은 것 넣을 줄 모르고 남을 위한 밥만 짓던 그녀가. 인생의 뒤안길에 다다라서야 귀한 이에게나 대접하는 전복죽을 받아든 것을 생각하면 전복죽은 참 씁쓸한 음식이다. 이런 비감을 나만 느낀 것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시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시어머니는 한번도 전복죽을 끓이지 않았다.


'난봉꾼에게 시집을 가면 오래 산다'는 점장이의 말이 아주 헛소리는 아니었던지 과연 김수현 씨는 오래 살았다. 그 중 마지막 십년은 요양원에서 보냈다. 김수현 씨의 장례식날 다섯 딸들, 그러니까 시이모 다섯 분은 말이 없었다. 각자의 기억 속에서 엄마를 더듬는 중인가 보았다. 같은 엄마라도 자식들에겐 각기 다르게 기억되기 마련이다. 첫째가 기억하는 엄마와 둘째가 기억하는 엄마, 막내가 기억하는 엄마, 딸이 기억하는 엄마, 아들이 기억하는 엄마는 또 다르다. 엄마의 사랑이라는 게 모든 자식에게 늘 동일하게 나눠 내려지는 것은 아니기에. 그러나 다섯 딸 모두에게 똑같이 기억되는 김수현 씨는 '매끼 더운 밥을 해놓고 자식이 먹는 모습을 못내 흐뭇하게 바라보던 엄마'였다. 그리 추운 날도 아니었건만 이모들은 자꾸만 한기를 느낄 때 나오는 스읍-소리를 냈다. 이미 오래전에 기억을 놓고 자신들을 잊은 엄마이건만, 엄마의 죽음 앞에 새삼 딸들은 추위를 느꼈다.




평생을 먹이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인생. 먹이는 일로 기억된 인생. 인생 끝자락에 전복죽 한 그릇으로 위로받기엔 너무 고단했던 한 여자의 일생. 김수현 씨에게도 먹이는 일 외에 다른 인생사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녀를 기억할 것이 밥 뿐이라는 것이 미안하지만. 그 밥이 있어 완이의 엄마가 있었고, 완이가 있었고, 완이의 가족이 있을 수 있었음에, 밥심이 중심이라고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중심을 구축해준 김수현 씨에게 거장에 대한 예우를 갖춤이 마땅하다. 김수현 씨의 인생을, 그 이름 석자를 더 많은 사람이 기억해주기를 바라며 김수현 씨에게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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