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짤 시간에 모유를 한방울 더 짜라
"엄마 엄마, 만약에 있잖아,"
"가시내야, 당장 지금 사는 것도 폭폭한디 만약에는 뭔놈의 만약에냐."
나와 엄마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대화 시작했다, 대화 끝났다. 어린 시절 우스개로 부르던 노래처럼 허무했다. 합이 맞지 않으니 이어질래야 이어질 수가 없었다.
엄마는 실리주의자다. 소득 없는 일에 마음을 쏟지 않는다. 엄마를 닮았더라면 내 삶은 훨씬 더 가볍고 산뜻했을 거라고, 또 의미없는 '만약에'를 떠올려보는 나, 엄마의 딸. 당신과는 정반대로 평판에 휩쓸리고 감정에 치우치는 딸을, 엄마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고보면 대체로 엄마는 청승맞은 걸 혐오했다. 발라드, 신파, 감성팔이, 모두 엄마가 몸서리치게 싫어하는 것들이었다. 방 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저 혼자만의 감상에 젖어 눈물을 흘리는 어린 딸에게도 엄마는 가차없었다. "저 가이내는 끄씸하면(걸핏하면) 처운다"며 구박하기 일쑤였다. 소득도 없이 몸 속에 있는 수분을 말리고 있을 시간에 차라리 원하는 걸 네 입으로 말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눈물을 그치고 스스로 입을 열어 이유를 말하기 전까지 엄마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늘 Y랑 절교했어. 안 울고 싶은데 자꾸 눈물이 나."
"그래, 어쩌라고."
"그냥 그렇다고."
"그래서 나보고 어떻게 해달라는 건데."
"엄마보고 어떻게 해달라는 게 아니야. 그냥 내가 눈물이 난다고."
"그럼 왜 집에 와서 우는데. Y 앞에서 울지."
문제를 인식하면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엄마와 그저 감정을 털어놓으며 해소하길 원하는 나. 하필 극도의 문제해결형 엄마 밑에 극도의 감정과잉형 딸이 태어나고 만 것이다. 학창시절은 물론이고 성인이 되어서도, 심지어 결혼 후에도 엄마와 나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대책없이 '만약에'를 남발하는 나를 보면 엄마는 복장이 터졌고, 그런 엄마가 '정신을 차리라'고 일갈하면 나는 김이 빠졌다.
그래도 엄마는 내 엄마고, 나는 엄마의 딸인고로 우리는 별수없이 다시 말을 섞었다. 사실은 일방적인 나의 구애였지만. 첫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도 나는 제일 먼저 엄마에게 쪼르르 전화를 걸었다.
"엄마, 요즘은 산후조리원 많이 들어간대. 만약에 산후조리원 들어가면, 아니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는 뭔 만약에. 무슨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고 있냐. 산후조리원 갈 필요 없다. 내가 해주꾸마."
문제해결형 엄마가 내 평생 이토록 든든한 적이 있었던가. 화끈한 엄마, 해결사 엄마, 우리 엄마, 만세!
엄마 덕에 마음 편히 임신기간을 보내고 친정동네에서 아기를 낳았다. 순산이었다. 이제 아기와 함께 친정집으로 가서 회복에 힘쓸 일만 남아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기를 낳은 지 한나절이 지나도록 병원에서 아기를 보여주지 않았다. 병실로 걸려온 전화를 받은 남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기가 숨을 잘 못 쉰다고 했다. 그 길로 남편은 지갑과 핸드폰만 챙겨들고 아기를 따라 구급차에 올랐다. 그렇게 아기는 두시간 거리의 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
하릴없이 눈물이 흘렀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퇴원하기 전날 밤까지도 아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 남편의 목소리가 꺼칠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아기의 경과가 전해져와서 나는 또 울었다. 울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우는 일이 아니면 도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아기가 가기 전에 입고 있던 배냇저고리만이 내게 도로 주어졌다. 내가 마련해둔 것이 아닌, 병원에서 임시로 입혀준 것이었다. 아기는 입었던 옷에 체취를 남길 새도 없이 숨가쁘게 떠났다. 아기의 살이 닿았던 천조각을 가슴에 얹고 가만가만 숨을 쉬었다. 밤새 나의 숨이 아기에게 가서 닿기를 빌고 또 빌었다.
퇴원하는 날 아침까지도 여전히 아기는 돌아오지 못했다. 아기 없이 퇴원하는 산모는 눈에 초점이 없다. 엄마와 아버지만이 나와 나의 짐들을 차에 싣느라 분주했다. 친정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끝끝내 아기가 돌아오지 않으면 아기를 따라 죽어야지, 마음을 굳혔다가도 죽을 생각을 하면 너무 무서워 도리질을 쳤다.
이렇게 무서운 생사의 기로에서 아기는 엄마도 없이 어떻게 버티고 있는걸까. 나는 엄마 옆에 있는데. 내 아기 옆에는 흰 옷을 입은 사람들과 낯선 기계음만 가득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눈물이 주르르 흘렀고, 가슴께에선 주인 없는 젖이 눈치도 없이 따라 흘러내렸다.
"울지마라, 운다고 뭐이 되냐."
엄마가 지그시 내 눈가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엄마가 내 눈물을 닦아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처절한 시기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엄마가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순간 목구멍에서 누르고 있던 소리가 입을 열고 터져나왔다. "애기, 애기 보고 싶어. 애기 보고 싶어어." 꺼이꺼이 울었다. 눈물을 막으려던 엄마의 손이 오히려 눈물샘을 열어버린 셈이 됐다.
엄마는 나를 TV가 있는 방으로 데리고 갔다. 연식이 좀 된 브라운관에선 '신비한 TV 서프라이즈'가 한창이었다. TV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깔고 등받이를 만들어 나를 앉혀놓은 뒤, 엄마는 곧 소반에 밥과 국을 차려와 코 앞에 들이밀었다. 미역국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국이었다. 바닷내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저 고소하기만 한 국냄새가 그 와중에 마땅했다.
"뜨끈하게 들깨국 좀 마셔봐라. 좋은 거 먹고 좋은 생각을 해야 좋은 젖이 난다. 그래야 애아빠한테 들려가 애기한테 보내지."
급하게 약국에서 사온 3만원짜리 수동유축기를 엄마는 소독과 건조까지 마쳐 내 옆에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엄마는 아기에게 보낼 모유를 내라며 나를 채근하고 있었다. 흐르는 내 눈물을 엄마가 손바닥으로 누른 건, 아마 눈물이 도로 몸 속으로 들어갔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저게 차라리 젖으로 나올 일이지. 아깝구로.
엄마는 그랬다. 내가 쓸데없는 일에 감정을 소모할 때 엄마는 살림을 살고 밥을 차렸다. 내가 나의 아이를 이미 잃기라도 한 것처럼 울어댈 때도 엄마는 아이를 위해 할 일을 상기시키며 들깨국을 끓였다.
엄마의 성화로 한술 뜬 들깨국이 생각보다 맛있어서 또 서글펐다. 젖이 나오면 뭐하나. 먹을 애기가 없는데. 눈물이 왈칵 나왔다. 애기야 미안해. 나 혼자 먹어서 미안해. 맛있다고 생각해서 미안해. 아기가 옆에 없어서였을까. 뜬금없이 앞에 앉은 엄마에게 사과를 건넸다.
"엄마,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진짜 미안한 거는 맞냐. 니 별로 안 미안한 거 같은데."
그 말이 또 서글퍼 더 눈물을 쏟아내려는 내게 엄마는 담담하게 말했다.
"부모자식간에 미안하다 소리는 하는 게 아니다. 꼭 넘같아져버리지 않냐."
엄마의 말이 꼭 나와 아기를 두고 하는 말처럼 들렸다. 엄마의 의도야 어떻든간에 나는 아기에게 그만 미안해하기로 했다. 이제 아기와 나는 남이 아니니까. 미안해하는 대신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야무지게 눈물을 닦았다. 아기를 맞으려면 바빴다. 어쩌면 아기가 없는 이 시간은 아기를 맞기 전 마지막 준비를 위해 주어진 시간일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렇다. 세 시간 간격으로 모유를 유축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유축기를 집어들었다. 그렇게 모은 모유들을 남편은 부지런히 병원으로 날랐다.
나는 그 사이에 한번도 아기를 보러 가지 않았다. 급기야 아기가 보고싶어 못 견딜 지경이 된 엄마와 아버지가 아기면회를 가자고 권할 때에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아기가 보고 싶다고 울어놓고서 아기를 보러 안 가겠다는 속을 모르겠다고, 저렇게 독한 것이 다 있냐고, 엄마는 혀를 찼다.
가고 싶었다. 아기가 보고 싶었다. 가고 싶은 이유는 단 하나인 반면 아기에게 가지 않을 이유는 너무 많았다. 안아볼 수도 없는 아기를 유리창 너머로 마주하면 나는 또 울게 될 것이다. 아기를 두고 돌아오는 길에도 내내 울겠지. 겨우겨우 붙잡아 놓은 마음이 흐트러지고 만다. 그뿐인가. 두시간 거리를 왕복하다보면 적어도 한나절은 유축을 건너뛰게 되고, 그만큼 아기에게 가져다 줄 모유가 줄어든다. 또, 차에 오래 앉아있느라 아직 아물지 않은 봉합부위가 덧나기라도 하면 정작 아기가 돌아왔을 때 아기를 제대로 돌보지 못할 수도 있다. 아기가 올 때까지 몸과 마음을 최상의 상태로 끌어올려야 했다. 상황도, 아기도, 길게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서도 언제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올지 몰라 휴대폰을 꽉 쥔 채 설핏 잠이 들었던 오후였다. 062(병원이 위치한 도시의 지역번호)로 시작하는 번호를 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좋은소식일까 나쁜 소식일까 긴장하며 전화를 받았다. "내일 아기 데려갈 수 있게 준비해서 오세요." 혹시 꿈은 아닐까, 꿈이라면 깨지 말자, 최대한 천천히 일어나 느릿느릿 방으로 갔다. 출산한 지 일주일이 되도록 풀어보지 못한 아기짐 속에서 배냇저고리를 꺼냈다.
아기를 데리러 가는 길, 고작 두시간 거리인데 아기옷을 있는대로 다 챙겨넣는 바람에 가방이 묵직했다. 애 낳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산모 가방이 왜 이리 무겁냐고 핀잔을 주며 엄마는 가방을 뺏아들었다. 모유수유실에서 처음으로 안아본 아기는 너무 작고 보드라웠다. 아기가 짜부라지기라도 할까봐 팔에 잔뜩 힘을 준 채 아이를 안고 선 나를 보고 엄마가 내게서 아기를 받아들었다. "애기 이렇게 안고 가면 너 온몸이 다 아프다. 애기 안지마라."
의료진이 아기의 갈비뼈 부근에 박힌 의료용 스테플러를 뽑자 아기는 순식간에 빨갛게 자지러졌다. 어깨에 묵직한 가방을 둘러멘 엄마가 아기를 두 팔로 안고 얼렀다. "아가, 너를 아프게 했어. 아가, 다시는 이런 데 오지 말자." 꼭 필요한 말 외에는 좀처럼 하지 않는 엄마가, 하나마나한 말을 알아듣지도 못할 아기에게 부질없이 늘어놓았다.
돌아오는 길, 젖을 먹일 때가 되어서야 엄마는 내게 아기를 넘겨주었다. 그마저도 오래 먹이지 말라며, 아기가 잠이 들자마자 이내 데려가 토닥였다. 그러고 집에 가선 팔을 내려놓을 틈도 없이 국을 끓었다. 그 국을 받아먹고 나는 젖을 내어 아기에게 먹였다. 소득없는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던 엄마, 실리주의자 엄마는 나하고만 얽히면 기꺼이 손해를 봤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로부터 십여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엄마는 쓸데없는 전화질을 싫어하고 '만약에'로 시작하는 모든 문장에 질색한다. 내 눈물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러 닦아주던 엄마가 그리울 땐, 전화를 거는 대신 들깨국을 끓인다. 시간을 두고 은근하게 우려낸 멸치육수에 감자와 당근, 양파를 넣고 끓이다가 들깨가루를 듬뿍 풀어준다. 파를 넣고 한소끔 끓인 뒤, 불을 끈다. 뽀얗게 퍼져나가는 황백색 국물에서 그날의 엄마가 진하게 감돈다.
나에게서는 어떤 실리도 취하지 않았던, 바보같은 실리주의자. 나의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