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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엄마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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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필 Aug 10. 2020

아이의 담임선생님께

BGM :  I believe(영화 '엽기적인 그녀'OST)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라엄마입니다.

배경음악은 신승훈의 아이빌리브입니다만

저작권 시비가 두려운 관계로 선생님께서 직접 틀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벌써 네번째 등교입니다.

첫날을 제외한 세번의 등교 모두,

아이는 복수계획을 세웠답니다.

복수의 대상은, 송구스럽게도, 선생님입니다.


2학년 등교 첫날의 일기입니다


첫번째 등교날, 자기는 말을 잘 들어서 하나도 안 혼났다며 일기를 남겼습니다.

두번째 등교날, 자신의 받아쓰기 답안을 선생님이 찢어버렸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번째 등교날, 자기가 만든 작품을 선생님이 집에 가져가지 못하게 했다며 콧김을 씩씩거렸습니다.

네번째 등교날, "뛰지 마!"라고 선생님이 자기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며 눈매가 사나워졌습니다.


두번째 등교날부터 네번째 등교날까지의 세 가지 사건이 아이가 복수를 계획하는 이유인데요,


정말 몹시 송구스럽지만 본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선생님을 물어버리고 싶었지만 성공확률이 5프로도 되지 않아서 참았다"고 합니다. 왜 5프로도 안되는고 하니 선생님을 물려면 멀리서부터 달려오면서 단숨에 물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자기 턱 힘을 충분히 발휘할 수가 없다는군요.

그래서 다시 세운 계획은 동생을 데려다가 복도에 숨겨두고 자신은 착실하게 교실에서 공부를 하는 척 선생님을 안심시킨 뒤 복도에 숨어있던 동생이 지나가는 선생님을 물게 하는 작전이랍니다.


선생님,

제 아이가 이렇습니다.

말도 안 되는 작전을 이렇게 착실하게 계획하는 아이입니다.

논리적인 것 같아서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면 무논리도 이런 무논리가 없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근본 없는 놈'이라 할 만 합니다.

그리고 제가 그 근본 되는 애미로서 선생님께 송구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사실 세번째 등교날까지는 제 아이가 불쌍했어요.

왜 아이의 받아쓰기 답안을 찢으셨을까?

왜 우리 아이 작품만 집에 못 가져가게 하셨을까?

아이가 받아들인 상황과 선생님의 의도는 분명 달랐을 거라 짐작합니다. 그러면서도 선생님이 아이를 몰라준다는 섭섭함이 있었지요.


그런데 네번째 등교부터는 저 또한 아이에게 도무지 감정이입이 되질 않네요.

난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쌉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지? 라는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올랐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부디 용서하세요.

"너네 선생님은 왜 이렇게 너에게 함부로 대하시는 거지? 네가 매번 복수계획을 짜면서 집에 올 정도로 말이야. 내가 학교에 전화를 좀 해봐야겠다."


그 와중에도 아이는 계속 자신의 복수계획을 수정보완해가며 저에게 브리핑하고 있었지요. 어차피 니도 내 말 안 듣는 거, 나도 내 얘기나 할란다, 라는 마음으로 저는 계속 막말을 쏟아냈어요.

"어떻게 해줄까? 학교에 전화해서 선생님은 선생님을 하실 자격이 없으니까 그만 두시라고 할까?"

"아니 엄마. 엄마 2학기 때도 한번 지켜봐야지."

"뭘 또 지켜봐. 이미 세 번이나 지켜봤는데?"

"2학기 때도 화를 내는지 안 내는지. 그때 화 안 내면 복수 안 하지."

"그럼 그때도 화내면. 내가 전화해서 선생님 바꿔달라고 해도 돼?"

"아니, 내가 알아서 해야지."

"그럼 니가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

"그냥 니 얘기 들어주면 돼?"

"응."


그렇답니다. 선생님.

그냥 들어주면 된다네요.

그냥 들어주면 될 것을 순간의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감히 선생님의 거취를 운운하며 막말을 쏟아낸 점, 깊이 사죄드립니다. 


덜 된 놈의 엄마로서 덜 됐기나 말기나 내 자식인 고로 가끔은 애먼 선생님께 섭섭해할 때도 있지만, 아이가 기억하는 사건과 실제 상황은 다를 것이라는 점도 늘 짐작하고 있는 바입니다.


부디 남은 학기도 이 무논리적이고 쓸데없이 착실한 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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